일본 땅 작은 섬 神津島의 수호신 오다 줄리아, 그녀는 한국 여성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세살 어린 나이에 볼모로 잡혀 일본으로 끌러간 임진왜란의 희생양이다. 한국의 피를 받고 적의 나라(당시)에서 존경과 추앙을 받는 수호신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순환이 아닐 수 없다. 조국의 굴욕적인 수난사, 그 와중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적장 고니시 유끼나까(小西行長)의 볼모가 되었던 한 많은 여인, 오다 줄리아는 자신의 한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신앙의 승리자로 오늘 우리 앞에 우뚝 서있다. 올해로 19회째를 맞는 오다 줄리아제는 그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씌우기 위한 작은 노력의 모습들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하나의 가교가되어 맥을 이어온 오다 줄리아제는 하느님께 대한 지고한 사랑으로 자신을 봉헌했던 신앙인의 삶을 명백히 조명하는 신앙고백의 자리가 된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오다 줄리아가 잠들어있는 신진도에서 펼쳐질 오다 줄리아제, 그 추모의 현장을 미리 찾아본다.
동경도 신진도촌. 행정구역상으로 동경도에 속해있는 신진도(고즈섬)는 동경에서 1백78km 떨어져있는 작은 섬 중의 하나다. 면적 18.59km, 강화도의 반쯤크기인 이 섬에는 약 2천 4백여명의 주민이 어업을 중심으로 비교적 풍요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즈열도로 불리는 이 해상에는 大島, 利島, 新島, 式根島등이 나는 돌(飛石)모양으로 신진도에 닿아있으며 다시 남쪽으로 여러 개의 섬들과 연결돼 신진도는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섬사람들의 선조들에 대한 존경심과 신에 대한 경외심은 대단해 신진도 중앙에 자리한 유형자(流刑者)묘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신선한 꽃이 봉헌돼있고 심한 폭우 속에서도 여러 개의 석유등이 묘지를 환히 밝히고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 탓으로 육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이곳은 특히 줄리아제가 열리는 매년 5월하순경부터 관광객과 순례객이 쇄도, 섬전체가 떠들썩한 잔치 집으로 들뜨게 된다. 때문에 소규모 여관 몇 개뿐인 이 섬은 도내 전가구의 3할 이상에 해당하는 2백 10곳의 민박시설이 관광객 유치에 큰 몫을 해낸다.
풍요한 인정, 외지 손님에 대한 따뜻한 환대를 자랑으로 삼는 신진도 주민의 기질은 우리 한국의 딸 오다 줄리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 마지막 유배지 신진도에서 보낸 그녀의 일생, 순교자적 삶의 모습은 4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섬 주민들의 가슴 밑바닥을 면면히 흐르는 기본 뿌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교를 금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줄리아의 신앙은 무지하고 가난하며 외로운 섬 주민들에게 의술과 인정을 베풀고 그들의 삶을 위로하는 폭넓은 사랑으로 표출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 사랑의 흔적을 오다 줄리아제를 통해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한국의 딸로 태어나 이국땅, 이민족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 그녀는 누구인가. 천지도 분가 못할 세살 어린이인 줄리아는 5만여명의 포로들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대륙감정의 야욕 속에 한반도를 발판으로 택한 일본에 의해 무참하게 저질러진 우리민족의 대 비극, 바로 임지왜란의 볼모였다.
4분 5열 된 국토와 민심을 수습하고 아시아 제 지역에서의 침략을 일본통일의 연장으로 착각한 전쟁광 풍신수길이 일으킨 임진ㆍ정유왜란은 당시 조선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괴, 빼앗아갔으며 무수한 인명을 죽이고 볼모로 잡아 외국에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따라서 어린 줄리아의 비극적 삶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와 맞물려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적장 소서행장(세례명 아우구스띠노)에 이끌려간 그녀는 본디 고려의 양반계 출신으로 현재 밝혀지고 있다. 마침 신자였던 소서행장의 가정에서 줄리아는 신심 깊은 신앙인으로, 또 덕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이 죽고 소서행장의 정적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력을 잡자 줄리아의 평탄한 신앙생활은 위기를 맞게 된다. 크리스찬에 대한 혹독한 박해의 시작과 함께 줄리아의 미모와 지혜를 탐낸 덕천가강이 배교를 강요하고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한 것.
『어떠한 고문을 받더라도 지상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하느님을 배반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덕천가강은 마침내 추방형을 명하게 된다. 첫번째 추방지가「大島」. 『신부님께 사룁니다. 저는 궁중에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내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궁중에서 쫓겨나 대도에 추방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직 부족한데도 이렇게 사랑의 은혜를 입어 추방의 형을 받게 됨은 참으로 감사드릴 말이 없사옵고 감사에 넘칠 뿐이다』
대도로 출발하기 직전, 당시 일본 천주교의 대표격인 프랑스와 파시 신부에게 보낸 서신에는 추방에의 두려움보다는 하느님께 한발 짝 가까이 다가간다는 무한한 기쁨 속에 잠겨있는 줄리아를 보게 된다. 그녀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자 그녀는「대도」에서「신도」(新島)로, 다시「神津島」로 추방돼 유폐되어 버린다.
마지막 유배지 신진도는 7ㆍ8명 정도의 어민이 어렵게 살아가는 고도(孤島)였다. 바위투성이의 섬을 그리스도수난의 산으로 생각,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기로 결심한 줄리아는 그로부터 40여년간 관상생활과 섬주민에 대한 봉사생활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다. 유형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고백한 그녀의 편지 등 그녀에 관한 기록들은 1605년~1620년경 예수회 연보등지에서 다수가 발견되고 있다.
현재 로마예수회 기록소에 보관돼있는 1614년 기록에는 기리시단이라는 이유로 무인도에 가까운 외딴섬에 추방당한 줄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록들은 한결같이 고통 속에서도 좌절 하지 않고 오히려 한층 강력하게 승화되고 있는 줄리아의 신앙을 그리고 있다.
줄리아와 신진도의 관계는 4백여년간 바깥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섬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고 또 그녀의 제사를 걸림 없이 지내오고 있는 신진도의 관습이 바깥세상, 특히 교회의 관심을 끈 것은 불과 20여년 전부터였다. 일본교회사가들의 사적연구와 함께 예수회ㆍ프란치스꼬회ㆍ도미니꼬회 등 당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던 수도회의 古문서가 정리, 출판될 때마다 보고서ㆍ편지들을 통해 줄리아의 존재는 확인됐고 신진도에서의 행적을 찾는 작업이 시도됐다.
신진도내 流人들의 묘지 한가운데 자리한 특이한 모양의 2층 묘비, 한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묘비는 4백여년간 섬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아온 어떤 여인의 무덤이었고 관계자들은 그것이 줄리아의 무덤으로 추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섬 주민들만으로 이어져온 신진도의 수호신 줄리아 추모제는 70년「동경7도신문사」「일본 가톨릭신문사」및 동경대교구 후원으로「오다 줄리아 현창회」가 조직되면서 공식적인 행사로 추진돼 올해로 19회째를 맞게됐다.
72년 줄리아의 묘토 일부가 한국 절두산에 안장된 것을 계기로 박희봉신부가 중심이 되어「오다 줄리아 현창회」가 결성됐고 양국의 오다 줄리아 현창회는 신진도의 수호신 줄리아가 남긴 성덕과 믿음의 향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매년 줄리아제를 개최해오고 있는 것이다.
2박3일간 이어지는 오다 줄리아제는 동경항에서 출발하는 3천톤급 정기여객선 승선준비에서부터 시작된다. 순례단은 부두에서 개최되는 간단한 절차의 결단식을 거쳐 승선, 8시간의 항해 끝에 신진도에 닿게 된다. 줄리아 현양비 앞에서의 기념미사, 묘지참배, 꽃 바치기 등의 공식행사는 한ㆍ일 현창회 대표단과 순례단이 공동으로 마련,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양국과 양국교회를 조금이나마 이어주는 유일한 공동행사인 셈이다. 섬 특유의 거센바람이 인상적인 신진도의 줄리아제, 한국 순례단은 4백여년전 우리 민족의 비극과 고통, 그 와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아름답게 승화시켜 이민족에게도 보여준 한국의 딸 줄리아를 통해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금 생각케 된다.
지혜와 덕성을 겸비한 여성의 사표로 또 신앙과 정결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오다 줄리아, 신진도 곳곳에 서려있을 그녀의 숨결과 발자취와 동행하면서 우리는 명백한 현실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과거의 아픔, 뼈저린 역사의 교훈도 함께 생각치 않을 수 없다.
이윤자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