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귀한 손님 한 분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날따라 국수로 저녁식사를 때우려던 터라 다른 음식을 준비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손님이 오면 닭을 고아 대접했다. 극진한 손님인 경우에는 개를 잡아 올리는게 최고였다. 집안 어른의 생신에도 한해동안 길러온 누렁이를 잡곤했다. 개 한마리를 가마솥 가득 앓혀놓은 아들이 방에 들어가 효성스런듯 아버지가 앉아 있는 방석밑에 손을 넣으면서 『개를 앉혔더니 방이 따뜻해 오나?』했단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생일 잔치를 하면서 개 뼈를 휙휙 창밖으로 내던지니 온 동네 개들이 모여 서로 다툰다. 『오늘은 개 생일이네』하면서 줄곧 제 아버지를 개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였다고 한다.
예수님도 보신탕을 잘 하신 모양이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신』 (마태15:13)걸로 봐서 유대나라 「가이」(狗)는 물론 소아시아의 가이 마저 모두잡아 드시고 바다건너 빌립보 지방까지「사랴」(買)원정 가신게 아닌가?
우스개 소리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음식으로 하는 개는 애완용개라기보다 식용으로 길렀다. 개한테 옷을 해입히고 향수를 뿌리고 함께 끌고 안고다니는 사람들이 볼 때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폐결핵에 좋다고 개를 잡아 푹 고아 먹었고 소화가 잘 된다하여 위장이 약한 사람들이 이를 좋아했다. 소고기는 왜 먹는가! 힌두교도 앞에서 등심이 어떻고 제비츄리가 어떻다느니 해보라! 이렇게 보면 우리네 풍습에서는 개를 끌어 안고 입맞추고 하는게 오히려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해야 맞는 말이 될 것 같다. 어찌하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개-에 관한-소리만 늘어 놓게되었다. 에스키모인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으레끌고가던 개를 주식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우리의 지금에 먹는 기호까지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게 어찌 뒷맛이 씁쓸하다.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그곳에 영양탕이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이 가끔 생기는걸 보면, 큰 계약을 앞두고 재수 없다면서 영양탕을 금기시하는 사람들 보다는 내가 조금은 더 예수님 앞에 떳떳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