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일을 「강복」이라고도 하고 「축복」이라고도 한다. 과거에 가톨릭에서는 「강복」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개신교에서는「축복」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왔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에서 일치운동을 강조한 직후 1960년 중반에 가톨릭 공용어 심의 위원회에서 일치운동의 차원에서 「강복」과 「축복」을 혼용하기 시작하였다.
「강복」은 복을 내리신다는 뜻이므로 그때까지 『우리를 강복하소서』하던 것을 『우리에게 강복하소서』로 바꾸고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로 하였던 것이다. 말이란 어느 나라말이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뜻이 바뀌게 마련이다. 어원 그대로 남아있으면서도 다른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허다하다. 「축복」은 복을 빈다는 뜻인데 『모든것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수 있다고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을 쓰느냐』고 비난하는 국어학자가 있다(가톨릭신문 10월13일자 제9면 참조).
그러나 국어사전에서는 「축복」을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①행복하기를 빔 또는 비는 일 ②남의 복된 일을 기뻐하며 축하함 ③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신자에게 복이나 은혜를 내림을 이르는 말 (주여, 축복하소서/깊은 믿음에 축복/있으리라) ④복, 행복 (축복을 누리다). 그런데도 ①만이 옳고 ②와 ③과 ④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개인 의견일 수는 있어도 대중의 언어생활에서는 고립될 수 밖에 없는 고집이다. 「축복」은 이미 「복」과 「행복」이란 뜻으로 널리 사용되는 말마디로 변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강복」이란 단어는 「가톨릭용어」로 못박아 설명하고 있다. 일치운동의 일환으로 개신교에서 널리 쓰고 있고 이미 한국사회에서 「하느님 의 축복」이란 말을 아무 저항없이 쓰고있는 것을 가톨릭이 그대로 받아들인것이다.
중국말에서 온 단어들이 우리말이나 일본말에서 뜻이 변한 것은 무수히 많다. 일본 성경에도 루가 1, 42절에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중에서 당신은 축복받은 분입니다』하고 축복이란 단어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누구에게 빌 수있단 말이냐?』란 주장도 교리를 모르는 주장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우리를 위하여 성부께 빌어 주실 터이므로 무엇이든지 당신 이름으로 구하면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요한 15, 16) 라고 약속했고, 성령께서도 『깊이 탄신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 8, 26) 하였다.
인류의 구원사업은 삼위일체이신 성부ㆍ성자ㆍ성인께서 함께 하시고 하느님의 은총은 성부께로 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신 안에서 내려오는 것임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고있다. 하느님의 축복은 삼위일체 안에서 빌고 간구하시는 성자와 성신의 작용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기본교리를 아는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이 누구에게 빌수 있단 말이냐?』가 교리 무식의 소치임을 깨닫게 되리라. 신앙의 진리를 부족하게 아는국어학자의 의견을 수렴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축복」이란 말과 「기복」이란 말이 어원상으로는 똑같이 복을 빈다는 뜻이지만 「축복」은 좋은 뜻으로 쓰이고「기복」이란말은 나쁜 뜻으로 쓰이고 있다. 「축복」은 하느님이 원해서 주시는 복이고 「기복」은 사람이 현세적인 복만을 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은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복신상」은 배척받고 있는 것이다.
한두분의 국어학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말이 안된다고 우겨대도 대중은 계속「하느님의 축복」이란 말마디를 사용할것이다. 미사통상문에서 『교우들을 강복하소서』는 『교우들에게 강복하소서』해야 옳을 것이다. 60년대에 바꾸었던 것을 그 전으로 환원시킨 것도 잘못이지만, 어원상으로도 「교우들에게」복을 내리시는 것이지 「교우들을」복을 내리신다고 할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