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고통분담과 십자가의 무게/배문한 신부

배문한 신부ㆍ수원 가톨릭대학장
입력일 2018-09-10 15:02:05 수정일 2018-09-10 15:02:05 발행일 1993-07-18 제 1864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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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노사분규며, 한의사와 약사회의 다툼을 보면서 집단이기주의를 자제하고 고통을 분담하자는 여론이 분분하다. 개인이기주의가 나쁘다면 집단이기주의는 더욱 나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조직된 이기주의이기에 그만큼 사회에 미치는 해독이 크기 때문이다.

집단적 이익에 혈안이 되어 투쟁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솝 우화가 생각난다. 손 끝 하나 놀리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받아먹는 배를 괘씸하게 생각한 손이며, 입이며, 이빨 등이 동맹파업을 하였다. 손은 음식을 만지려고도 않았고 입은 벌릴 생각을 중지하고 이빨은 씹을 생각을 단념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며칠이 지나니 손발은 후들후들 떨리고 입은 말라 터지고,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도 신체와 같이 하나의 유기체다. 전체가 흥하면 부분도 흥하고 전체가 망하면 부분도 설 곳이 없다. 그러니까 집단의 이익을 고집하기에 앞서 전체 공동체와 이웃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지혜랄까, 마음가짐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에 상응한 철학이나 신앙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니 네가 죽는 것이 내가 죽은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비체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통분담을 외치지만 고통분담도 이러한 신앙이 있을 때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분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마태 16,24)고 하셨다. 말로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분담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죽음을 전담하셨다. 따라서 그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참아 맡을 뿐 아니라, 남의 고통도 분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미사 때마다 “나를 기억하기로 이 예를 행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는 미사에 참례하는 자는 예수님을 본받아 고통의 분담자도 되라는 뜻으로도 알아들을 수는 없을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없애주러 오신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볍게 지는 새사람을 만드시러 오셨다. 십자가가 십자가인 한 아가씨 목에 걸린 장식품이 아니고, 무겁고 괴롭고 지겨운 것이다. 이 무거운 십자가를 불평불만하면서, 울면서 지는 것이 아니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고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웃으며 기쁘게 지고 가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사실 십자가의 무게는 상대적이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무게는 자기사랑(이기심)에 비례하고 하느님 사랑(이타심)에 반비례한다. Y=b/a·x란 함수관계로 표시할 수 있다. Y=체감무게 b=이기심 a=사랑 x=십자가의 실제 무게, 그리하여 실제 십자가 무게(x)가 10kg이고, 이기심(b)이 10이고 사랑(a)이 1이라면 체감무게는 1kg가 되고, 반대로 이기심(b)이 1이고 사랑(a)이 10라면 십자가의 체감 무게는 1kg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똑같은 10kg의 십자가가 사람에 따라서는 1백kg로 무거울 수 있고, 1kg로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인은 보통사람이 1백kg나, 1천kg나 되는 것처럼 무겁게 생각하는 십자가를 1kg밖에 안 되는 것처럼 가볍게 지고 가는 십자가의 선수가 되어야 한다. 내가 지는 십자가가 무겁다고 느낄 때 그만큼 이기심이 크거나 사랑이 적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자.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 온갖 희생을 바치나 그것을 괴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예수님께선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끊어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내 안에 내가 살아 있으면 있을수록 십자가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업인들은 노동자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의 고통을 분담해야 하고 노동자들은 회사에 대한 사랑으로 기업인들의 고통을 분담하려 할 때 대화며, 협상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 아닌가? 모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의 고통을 즐거이 분담할 때 이 나라의 앞날엔 서광이 비칠 것이나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싸울 때 불원간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여 나라의 꼴은 비참하게 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은 보이질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안 보이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주고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오늘과 같은 이 나라 현실에 있어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앞장서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고통을 분담하는데 솔선수범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웃과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국민이 되자.

배문한 신부ㆍ수원 가톨릭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