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의 성예술 순례] 10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김영섭ㆍ건축문화 설계 연구소장
입력일 2018-08-09 19:09:26 수정일 2018-08-09 19:09:26 발행일 1993-05-30 제 185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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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딕양식 성당의 중요한 전형

하나의 회랑으로 소성당들 연결
내부 기둥은 라틴풍의 기품 간직
성당맞은편 ‘쌩 샤삘’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볼 만
쾰른을 떠나 남쪽으로 길을 잡아 슈투트가르트에 들러 얼마 전에 작고한 영국의 건축가 제임스 스털링이 설계만 미술관을 보고나자 앞으로의 여로에 갈등이 생겼다. 가까운 라인강 건너의 그림 같은 도시 스트 라스부르그로가서 아름다운 대성당(지금은 프랑스 도시가 되었지만 대성당의 건축양식은 독일 고딕이다)도 보고 그 유명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물어볼 것인가.

아니면 독일 고딕과 다른 오히려 그 원전이 되는 프랑스 고딕을 찾아 파리 근처로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오랜 자동차 여행에서 몸에 밴 고달픔과 여수도 털어버릴 겸 해서 그 사이 이리저리 잘도 끌고 다녔던 나의 애마 피에스타를 돌려주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보덴호반의 스위스 국경도시 린다우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냈었다.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이 조그만 도시 전체가 침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음날 새벽같이 길을 떠나 남쪽으로 달리고 있는 알프스의 연봉을 바라보며 스위스를 횡단 점심 무렵 로잔에 도착하여 역전 위의 허츠렌트카 사무실로 피에스타를 끌고 갔다. 오랜 여정에 생명 없는 기계에도 정이 드는지 서운함이 어디선가 울컥 밀려왔다.

인사 대신 유리창을 톡톡 두어 번 두드려 주고 역으로 짐을 끌고 내려와 파리행 떼제브(TGV) 초고속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다시 파리.

뭇사람들의 지나간 세월과 사연들을 간직한 도시, 역시 내게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을 몇 개의 거리와 다리들. 그리고 희미한 가로등 빛 속에서 아련한 그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 추억의 카페가 있다.

퐁네프다리 건너의 카페 ‘라 볼떼르’는 아직 그대로 있을까?…

시테섬의 노트르담 파리대성당(NOTRE-DAM DE PARIS)은 1183년 초석을 놓고 1330년경 1차 완공을 하였으나 19C까지 끊임없는 보완과 덧붙임 공사가 진행되어 오늘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성당은 다른 어떤 교회당보다도 고딕성당의 최초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쉬제 아빠스(대수도 원장)가 건립한 생 드니 수도원 성당의 현저한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므로 초기 고딕 양식의 성당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형이 되는 성당이다.

고딕성당을 먼저 이해하려면 뒤에도 자주 인용되는 아브 쉬제(ABBOTSU-GER)라는 인물과 상 드니 수도원 성당에 대하여 잠깐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정확히 건축양식에 있어서 고딕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물은 1137년부터 1144년에 재건축된 파리 교외의 왕실 수도원 교회인 상 드니이다.

상 드니 수도원은 신성 로마제국의 대성왕이며 카롤링 왕조의 시조인 샤를르마뉴 대왕의 성묘가 있는 즉 프랑스 국토의 수호성자이며 프랑스를 가톨릭 국가로 만든 전도자가 묻혀있는 순례지이기 때문에 (대왕의 아버지인 피핀과 할아버지 샤를 마르텔 모두 여기에 묻혀있다) 이 수도원은 국가적으로 매우 특별한 역사적 장소성이 있는 곳이다.

987년 카롤링 왕가의 최후의 왕이 죽은 후 가신이었던 위그 카페(HUGH-CAPET)가 카페 왕조를 이어 갔지만 왕권은 급속히 빛을 잃어갔다.

왕권이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인 12세기 초 쉬제 대수도원장은 당시의 왕 루이 6세의 고문으로서 왕권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왕과 교회 사이에 동맹을 결성하여 주교들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들을 국왕편으로 만들었으며 프랑스 왕은 독일 황제와 대립하고 있는 로마 교황을 지원토록 하였다.

쉬제 대원장은 종교 정책면으로도 군주제를 옹호하였는데 국왕의 직무에 종교적 의의를 부여하고 그것을 강력한 정의의 오른팔이라고 찬양함으로써 왕권하에 프랑스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노트르담 성당의 지성소에 있는 피에타상을 경배하고 있는 루이 13세와 14세의 조상은 이러한 설명에 걸맞은 것이기는 하지만 건립 연대는 전혀 다른 18C초의 것이다).

족 상 드니 수도원의 건축계획은 무엇보다도 위와 같은 깊은 배경 속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종교적 애국적 감정의 초점으로써 성당 건립을 추진한 것이다.

이 위대한 수도원장은 스스로의 기획 전체를 상세히 써서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후세 사람들은 그 결과보다도 그가 이룩하려고 한 의도-즉 고딕의 정신세계를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딕 성당의 평면은 바로 이러한 고딕의 정신세계인 황도의 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조화 속에서 통일된 우주를 상징하는 체계로서의 건물을 짓고자 하는 쉬제의 뜻은 그 후 3~4세기를 거쳐 1550년 경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고딕양식은 어떤 다른 세기보다도 건축의 절대 우위성을 고수한 시기이다. 이때 조각과 회화 그리고 공예미술은 온전히 건축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장인예술의 절정을 이루었다.

20세기 디자인 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선언문 표지에 고딕양식 성당의 세 철탑(건축, 회화, 공예의 상징)위에 빛나는 별을 그려 넣는 것도 바로 이 고딕 정신이 의미한 것(모든 예술이 건축이라는 종합 예술의 장에 결합되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선언적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고딕성당의 평면은 노트르담성당을 놓고 설명하자면 대체로 로마의 바실리카식을 그 모체로 하고 있으면서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내진에 회랑과 방사형으로 늘어선 작은 소제단 내지는 소성당(CHAPEL)에 둘러싸인 아케이드식의 잎스(APSE)가 있다. 로마네스크식과는 달리 작은 소성당들은 따로따로 분리된 채가 아니라 하나의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앙보다 약간 윗부분에 전개되어 있는 트란셉트(TRANCEPT 소매체)와 내이브(NAVE:종방향으로 놓이게 되는 최종석)가 교차하는 곳에 미사전례를 거행하는 제대가 놓이고 그 뒤에 합창단(CHOIR)과 성직자석이 있게 되고 제단 안쪽에 생튜어리(지성소)가 자리 잡게 된다.

노트르담 성당의 정문은 서측에 3개가 있는데 좌측이 성모의 문, 중앙이 심판의 문, 우측의 것이 안나의 문이다. 성당 문짝의 당초문양철세공은 18세기의 것이고 부조역시 대부분 오래된 것이 아닌 근세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팀파늄(RYM-PANUM)이라 부르는 문 위의 막히 아취 부분에 새겨진 조각의 주제를 가지고 사람들은 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3개의 정문과 상부 장미창 사이에는 프랑스 역대왕의 입상이 나란히 서 있는 킹스 갤러리가 있고 그 위에 직경 9.6m 크기의 장미창(ROSE WINDOW)이 있는데 그 전면에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가 성합을 들고 좌우에서 호위하는 천사를 거느리고 서 계신다.

광장에서 바라보는 정문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부속 수도원의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 상부 팀파늄에 새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과 성 데오필로스의 기적이 눈여겨 볼만하다.

성당 내부 기둥은 초기 고딕의 특징처럼 로마네스크의 차분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독일 고딕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상승감을 억제한 라틴풍의 절도와 기품이 보인다. 마치 후면처럼 보이는 대성당 동쪽의 전면 외관이 시테섬 건너에서 보면 매우 안정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상부의 높이 솟은 벽과 기둥들을 지탱하고 있는 플라잉 베트레스(FLYING BUTTRESS 공중비게) 때문일 것이다.

이 버트레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최상부의 기둥과 보의 접합부에는 사나운 개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지옥의 입구를 지키는 플루토(PLUTO)이다. 더 높이 올라가면 두 개의 종탑이 있다. 남쪽 탑(1240년)이 북쪽 탑(1248년)보다 먼저 준공되어 종이 달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주인공 콰지모도가 매달렸던 대종으로 무려 13톤의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1686년에 당시의 루이 14세와 왕후 마리 테레즈가 헌종하였다. 북쪽의 탑에는 4개의 작은 종이 있을 뿐이다.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정의의 궁전이라 이름하는 빨레 드 쥐스띠스가 있는데 이 궁정 부속 예배당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쌩 샤삘(SAINT CHAPELLE)이다. 이 성당은 루이 9세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관과 십자가 조각을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국왕과 가신들이 전용 소성당이다. 즉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내부는 3랑 형식의 아래층이 신하용이요, 단일주랑식의 위층이 국왕용이다.

여기에 쓰인 스테인드글라스는 일 드 프랑스(IL DE FRANCE-왕권 쇠퇴기의 국왕 직속령으로서 파리와 그 근교를 지칭한다.) 시기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벽면 모두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바꾸어 현란한 빛의 교향곡을 연출하는 고딕 공간의 또 다른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섭ㆍ건축문화 설계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