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음식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여러 가지 식단이 적혀지고 자기에 식당을 소개하는 유인물 같은 받침종이를 가져다가 깔아 놓았다. 그런데 거기에 쓰인 한 줄의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식 (不如一食)’
음식에 대한 소문을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먹어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예비자 교리시간에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영성체 할 때 단지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온 인류를 끌어안게 되는 성찬의 신비 또한 백문(百聞)이 불여일식(不如一食)이라고 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공허하고 낡아빠진 용어가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이다.
흔히 ‘토마의 불신앙’으로 표현되는 요한복음 20장 24절 이하에서 토마 사도에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 동료제자들의 증언이 유언비어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서 아무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집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을수 없다’는 실증주의 차원이 믿음의 세계라는 차원과는 상반된다는 사실을 혼동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주님의 부재(不在)를 주장하고 나섰던 오만과 편견의 결과와 흡사한 것이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식 (不如一食)이 아니라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다. 아무리 듣고 보아도 우리가 확신을 갖고서 삶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도 토마 사도는 만져 보고서는 즉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았고 증거했다.
이제 우리는 백문(百聞)이 불여일식 (不如一食)에서 나아가 백식(百食)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