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일본 26성인 기념관」관장, 유우끼 료고 신부 인터뷰

입력일 2017-07-13 17:11:42 수정일 2017-07-13 17:11:42 발행일 1993-02-21 제 184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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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돕다 순교한 조선인 많아"
일본 성인중 한인 포함설 근거 미약
일본교회 신자수 적으나 선교열 커
스페인 출신 78년 일본으로 귀화…30여 권 저서도
덕천 막부시대, 화형ㆍ열탕형ㆍ십자가형 등 박해 절정
우리 민족 전체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 준 임진왜란(1592~1598년)은 비록 민족사에 있어서 뿐아니라 한국ㆍ일본 교회사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조선인들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이 중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순교당한 이들이 적지 않다. 오다줄리아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덕천 막부에서 잔혹한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이 역사를 통해 보다 더 복음적인 내일을 설계하고자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 영남 교회사 연구소(소장=김용흥, 지도=구본식 신부)는「일본 26성인 기념관」관장 유우끼 료고 신부를 초청, 오는 2월23일 오후 7시30분부터 대구 계산성당 문화관 3층 강당에서 강연회를 가진다. 「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게 될 유우끼 료고 신부는 강연에 앞서 본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유우끼 신부와 가진 서면 인터뷰 내용이다.

-신부님께서는 언제 일본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으며 일본으로 귀화하시게 된 동기와 신부님의 출생지와 사제서품 년도, 전공과목 등은 무엇입니까?

▲1922년 10월17일 금년 6월 세계 성체대회가 개최되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출생했습니다. 1939년 9월7일 예수회에 입회하고 콜롬비아, 보고타, 하베리아나 등 대학에서 수학(修學)하였습니다. 1948년 일본에 입국하여 수련을 하고 1954년 12월3일 사제로 서품됐습니다. 1956년 후구야마(福山)본당 보좌신부로 근무하였고 1957년 히로시마(廣島)의「예수회 수련원」교사로 약 5년간 일하다가 1961년 나가사끼(長崎)로 전근, 1962년「일본 26성인 기념관」자료관 주임으로 일하다가 1963년 이곳의 관장으로 취임했으며 1978년 일본으로 귀화했습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게 된 것은 일본에 있으려면 일본 국적을 갖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일하게 되었더라면 한국사람으로 귀화하였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저서가 30권이 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 책들을 집필하셨으며, 책의 내용들은 어떤 것입니까?

▲책들은 대개 작은 소책자입니다. 거의 기념관에서 발행한 것들로써「나가사끼(長崎)에의 길(道)」「나가사끼의 천주당」「나가사끼 외인묘지의 비문」「구주의 고성과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의 산타 마리아」「로마를 본 천정소년사절」「신사료 천정소년사절」「운젠의 순교자」「천초의 순교자」「교토의 순교자」「그리스도인이 된 다이묘」「일본과 바티칸」(프란치스꼬 사비엘에서 지금까지) 등등 입니다.

-일본 가톨릭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좀 비교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일본은 한때 천주교가 대단히 번성했는데 지금은 1억2천만 인구 중 40~50만명의 약소한 교세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일본의 사회는 옛날과 지금이 대단히 변하고 달라졌습니다. 현대의 선진국에서는 대개 같은 모양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2백여년 박해가 남긴 상처의 흔적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모두들 구원을 갈망했지만 현대에는 구원에 대한 동경심이 박약해진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 2월23일 대구에서 강의하시게 될「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들」은 모두가 임진왜란때 인질로 끌려간 한국인들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인질이기 때문에 처형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입니까?

▲게이쪼(경장 1596~7 병신ㆍ정유)전쟁때(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문록ㆍ경장의 역이라 하는데 문록은 1592 임진~1595 을미년까지)일본에 끌려온 한국인들은 구주(九州)에서는 나가사끼와 그리스도인 다이묘(大名)의 영지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나가사끼에서 살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또 선교사의 협력자 혹은 거처를 제공하고 숨긴 여인숙 주인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인질 가운데 세례를 받고 이태리 등지로 떠난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그곳에 끌려간 인질의 수는 얼마나 되며 그들 중 영세자수 순교자수 일본 생존자 그 외 도피자수는 어느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습니까?

▲이탈리아까지 갔다고 기록된 한국인은 한 사람 뿐이며 그때 이미 신자가 되어 자유민이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간 사람의 수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순교한 사람이 수십 명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본 26순교 성인중「한국인 3명이 포함돼 있다는 설(說)」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6성인들 가운데는 일본인 이외에 스페인 사람 멕시코 사람 인도 사람과 중국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한국인도 들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순교 때의 기록에는 한번도 한국인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1862년 이분들의 시성(諡聖)때 프란치스꼬 회원에 대해서 언급한 교황님 교서에 한 사람 즉「레오 가라스 마루(烏九)가 한국인」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그때에 범한 착오였다고 생각합니다. 레오 가라스 마루의 형제 바오로 이바라기(茨木)와 그 조카(生男)루도비꼬 이바라끼(茨木)는 일본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기록은『레오 가라스 마루는 일본의 오와리(尾張) 출신이며 본래는 승려(僧侶)였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일본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가 왜 그토록 혹독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요? 그 박해가 일본의 정치상황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요? 박해의 특수성과 특이한 고문방법 등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에서의 박해가 그와 같이 혹독하게 된 것은 도꾸가와(德川) 막부(幕府)의 방침이었습니다. 막부는 엄한 금교령을 내렸는데도 신자들은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막부는 애가 타서 차츰 가혹하게 탄압을 하게된 것입니다. 2백 년동안 아무도 막부의 처사를 제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박해 때는 십자가에 매달아 고문하고 죽이는「하리쯔게」(石桀)형이 있었고 후에 불에 태워 죽이는「화형」(火刑), 바닷물에 담그어 고문하는「미즈쯔게」(水責), 운젠(雲川)의 끓는 열탕(熱湯)에 집어넣어 고문하는「지옥탕」, 깊이 2미터 직경 1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형틀을 만들어 그 형틀에서 구덩이 안으로 거꾸로 매달고 특히 빨리 죽이지 않고 배교시키기 위해서 광대뼈 옆에 작은 구멍을 내어 머리에 충혈(充血)되지 않게 하고 내장의 반전을 막기 위해서 몸은 새끼줄로 칭칭 감아서 묶어 동그란 구멍을 낸 판자를 두장 겹쳐 허리에 칼을 끼운 뚜껑이 되는데, 캄캄한 암흑의 구멍에 거꾸로 달리는「아나즈리」등이 있었습니다.

-일본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 한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어느 정도입니까? 과거와 현재를 함께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일본교회 안에서 1할 정도이며 옛날(박해시대에) 나가사끼(長崎)에서는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갖고 있었던 적도 있지만 현재는 모두 함께 같은 교회를 이루고 있음으로 그 활약 같은 것을 구별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재임중인 일본 26성인 기념 관장은 언제부터 맡으셨으며 그곳에서 하고 계시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26성인 기념관은 1962년에 개관하고 그때부터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은 경영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역사 연구와 강연회, 간행물(刊行物)에 의한 소개 등입니다.

-일본 가톨릭교회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일본의 교회가 작으면서도 이미 사회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현재 세계 속의 다른 교회들과 같이 새로운 선교(宣敎)의 제문제(諸問題)에 대하여 전국(全國) 대회(大會)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협력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일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 알고 계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몇 해 전에 어떤 회의 때문에 부산과 경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큰 경험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책에서 배운 것과 기념관을 찾아오신 순례자들에게서 배운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