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빈민들의 성녀 데레사 수녀

입력일 2017-05-29 20:34:25 수정일 2017-05-29 20:34:25 발행일 1992-04-19 제 1801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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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ㆍ관심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
“낙태는 인류파멸시키는 최대의 무기”
「노벨ㆍ교황 요한 23세 평화상」등 수상경력 다양
“빈자 사랑하려면 먼저 가난 실천해야”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ies)를 창설하고 1979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데레사는 살아있는 성자로서 널리 추앙받고있다.

눈에 익은 흰색과 푸른 색의 수도복을 걸친 작고 야윈 수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이다』 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오늘날 최대의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쓸모없고 관심밖이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가장 큰 악은 착취, 부패, 빈곤과 질병으로 거리에 내쫓겨서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결여와 철저한 무관심이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살아왔고 설교해온 가장 좋아하는 모토는 『큰 사랑으로 작은 것들을 행하시오』 이다.

마더 데레사는 1979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헐벗고 굶주리고 집없는 이들, 눈먼이들, 나환자들, 사회에서 쓸모없고 사랑받지 못하며 관심밖이라고 느끼는 모든 일들이 이름으로 그것을 수상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녀는 『낙태는 인류를 파멸시키는 최대의 무기』 라고 말했다.

이따금 무기경쟁이나 계획적인 착취나 불의와 같은 구조적인 악을 공격하기 위해 그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녀는 그런 일은 자기의 임무가 아니라 가롤릭 평신도들이 임무라고 간단히 대답하면서 『일단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모든이에게 모든 것」 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치분야에서는 평신도들이 정의, 진리를 위해서 싸우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라고 1982년의 한 회견에서 말했다.

최근에 그녀는 에이즈 환자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에 에이즈환자를 위한 피난처를 개방했다.

또 외국인 교회봉사자들에게는 대개 개방되지 않은 나라들, 쿠바나 소련에 그녀는 빈민원을 세웠다.

마더 데레사는 1950년에 인도 첼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했다. 이 선교회는 활동하며 관상하는 선교회이다.

1990년 4월의 통계에 의하면, 이 선교회는 미국인 출신 57명을 포함해서 약 1천9백명의 허원한 수녀들이 98개국의 약 4백20개 빈민원에서 일하고 있다.

1963년 마더 데레사는 호주계 앤드루 트라버스 볼(Andrew Travers Ball) 신부와 함께 사랑의 선교형제회 (Missionary Brothets of Charity)를 창설했다.

1969년 마더 데레사의 사업에 참여하려는 평신도들의 점증하는 관심에 부응하여, 마더 데레사의 공동봉사자회가 범기독교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조직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인가를 받았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알바니아 계이며, 자매 아가(Aga) 와 오빠 라자(L, azar) 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식료품상이였으나 가족 배경은 상인보다는 오히려 농부쪽이었다.

라자는 어머니의 모범이 아녜스의 소명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12세때, 나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이 소명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선교사가 되고싶었습니다』 라고 그녀는 말한 적이 있다. 18세 때에 그녀는 집을 떠나 로레또 자매회로 알려진 동정 성모 마리아회의 아일랜드 지부에 입회했다. 더블린과 인도의 다질링에 있는 그들의 수도회에서 수련을 한 후, 그녀는 1928년 수녀로서 첫 서원을 했고, 9년 후에 종신서원을 했다.

1946년 그녀는 『소명안에서의 소명』을 받았다면서 『그 메시지는 분명했다. 나는 수도원을 떠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했다』 고 말했다.

2년 후에 교황청에서는 그녀에게 로레또 자매회를 떠나 캘커타의 대주교관할하에서 새 소명을 따르도록 허락했다.

1950년 사랑의 선교회는 관구 수도 공동체가 되었고, 15년후에 바티깐은 교황청 산하의 교황 직속선교회로 인가했다.

이 선교회의 회원들은 가난, 순결및 순명을 서약하지만, 가난에 대한 허원은 다른 어느 수도회보다 더 엄격한데, 이는 마더 데레사가 설명했듯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고 알 수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가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의 선교회-자매 및 형제회-는 가난한 이들중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성심성의껏 봉사한다는 네번째 서원을 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57년에 나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1946년 인도의 봄베이를 방문했을 때 마더 데레사에게 미국인들이 교황께 선물한 흰색 링컨 콘티넨랄 자동차를 주었다. 그녀는 그 차를 팔아서 나병환자 센터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재정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태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 고 전제 『나는 결코 돈에 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생깁니다. 주님께서 돈을 보내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업을 합니다. 그 분께서 자금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자금을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그 분께서 그 사업을 원하시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라고 말했다.

그녀의 고요하고 단순한 믿음과 실질적인 능률성의 조화는 그녀와 접하게 되는 사람들을 간혹 놀라게 했다.

1982년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근절하기 위해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포위했을 때 마더 데레사는 동 베이루트에 있는 양로원과 스프링스쿨이 수녀 공동체를 문했다. 그것은 그녀가 전쟁지역을 최초로 방문한 것이지 마지막 방문이 아니었다. 구호품에 대해 적십자 인원과 만나서 그녀는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방금 폭격당한 근처의 한 정신병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정신적육체적으로 불구가 된 어린이 37명을 즉시 피난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정력과 능률성이었다』 라고 당시 어린이들을 철수하는 일에 관여한 적십자요원이 말했다.

마더 데레사와 그녀의 사업은 1968년에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유명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며 사회비평가인 맬컴머저리쥐(Malcolm Muㆍ ggeridge) 는 그녀에 관한 TV 다큐메타리,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그 무엇」을 제작했다. 그때 이후에 그녀는 여러 저서들과 수 많은 잡지 및 신문기사의 주제가 되었다.

머저리쥐와 아내 키티가 1982년 11월 가돌릭신자가 되었을 때, 그는 마더 데레사 때문에 개종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내가 얼마나 그녀의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말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새 비젼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랑의 놀라운 위력과 한 헌신적인 영혼안에서 그것이 온 세상을 감쌀 수 있는 싹을 틔울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라고 그는 런던 타임즈지에 기고 했었다.

바오로6세 교황은 1971년 요한 23세 교황의 평화상을 최초로 그녀에게 수여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용감한 메신저에게 모든이의 찬양을 보냅니다』 라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녀가 로마에 올 때마다 당신을 방문하도록 초대했다. 1982년 그녀가 로마를 떠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레바논으로 출발하려 했을 때, 교황은 그녀를 주교회의에 초대해서 『그녀는 평화라는 언어를 벌써 알고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의 그리스도교 영성에, 그녀의 영혼에, 그녀의 천성에, 그녀의 가슴에 깃들어 있기 때문』 이라고 공포했다.

그러나 많은 찬양을 받는 중에서도, 마더 데레사가 비판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가난을 구제하려는 프로그램을 짜고 허가를 받으려고 기민하게 행동하는 대신에, 그녀는 이웃속에 들어가서 가난을 함께 나눈다.

노벨 평화상과 요한 23세 교황의 평화상외에도, 마더 데레사는 1973년에 템플톤상, 1971년의 J. F. 케네디 국제상, 1979년 의박애ㆍ평화 및 형제애에 대한 30만달러의 발잔상과 인도최고의 상 파드마슈리 메달을 포함해서 수십개의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