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군 사건, KAL기격추사건, 떠들썩했던 경제적 부정사건 등등 끔찍했던 사건들이 불행히도 한국민의 기억속에서 너무 빨리 사라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하기야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과거에 있었던 엄청난 일을 잊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력과 함께 망각의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때가 드물지 않다. 오는 5월 6일은 우리 순교복자 1백 3위가 여의도 광장에서 방한중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시성된지 꼭 한 돌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가 있었다면 자기 관심 밖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을 망각의 은혜로 돌릴수는 없을 것이다. 시성 1주년 기념일이 신문에 발표되기까지 그날을 기억하고 있던 교우들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교우들은 고사하고 이날을 미처 생각하지못한 교구들도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조차 든다. 이날에 기념행사를 갖는 교구는 필자가 아는 한에서 서울교구뿐이다. 그나마도 기념미사와 심포지움뿐이고 또 심포지움은 연기되었다고 하니 어딘가 체면에 몰린 느낌마저 갖게된다. 우리 한국성인에 대한 공경심이 점점 식어가고있는 슬픈 현상은 이미 신문지상에서 지적된 바도있어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시성을 향한 14년간의 끈질긴 노력과 열렬했던 기도, 특히 시성 당일에 넘쳐흘렀던 기쁨과 감격을 생각할 때 성인공경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란면 누구나 오늘의 슬픈현실을 초래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숙고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1984년 5월 6일의 여의도 광장. 「이땅에 성인나셨네」하며 기쁨에 겨워 환호하던 백만인파! 이날은 하느님이 주신 은혜의 날, 세계교회사상 처음으로 한꺼번에 1백 3명의 성인이 탄생하는 날, 세계교회 사상 처음으로「바티깐」밖에서 시성식이 거행되는날, 세계속의 한국교회로 격상되는 날, 1백 3위 성인과 더불어 새로 태어난 한국교회가 3백년대를 향해 힘찬 첫발을 내딛는 날, 그리고 한국교회의 1백 50만 신도가 모두 한 마음 한뜻이 되어 역사적이고 감격적이고 축복되고 영광된 날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날의 감격, 그날의 기쁨, 그날의 결심이 그렇게도 빨리 사라져여만 했던 것일까? 너무 외부적 신심에만 몰두한 때문이었을까? 14년간의 시성운동에 지쳐버린 때문일까? 아니면 시성에의 염원이 현실화되자 갑자기 긴장이 풀린 때문일까? 또는 스스로 만족하고 그 만족감에 도취된 때문일까? 물론 그간 우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중단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해 10월 14일「로마」베드로 대성전에서의 시성경축미사를 전후하여 기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무엇보다도 한국성인을 수호자로 모시는 본당이 날로 증가하고 있고 또한 한국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고 그들을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신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들이 없지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외부적인 성인공경에만 만족하고 있어야 할것인가?
성인공경은 주로 새가지 목적을 갖고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다. 성인은 성인 자신의 영광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더하고 우리의 구원을 돕기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성인은 천상에서 가장 힘있는 우리의 求者이다. 특히「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 가톨릭은 성인의 求力을 굳게 믿고 필요한 것을 청할줄 아는 신뢰심이 필요하다. 셋째로 성인은 우리 신앙의 귀감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시성식 강론에서 교황께서『이제는 당신들이 증거할 차례입니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한국 주교단이 금년을「증거의 해」로 결정한 것이나, 귀감으로서의 성인공경을 강조한 것이 그 특징이다.
순교란 원래 증언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은 누구나 증언의 임무를 지닌다. 순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최대의 증언이므로 모든 증언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103위 성인을 탄생시킨 한국교회의 순교(증거)전통을 귀감으로 현대세계에 적용된 증언을 해야할 임무를 지니고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따를수 없듯이 우리 성인을 모르고 그들을 따를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만 나기 위해 우리가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듯이 우리 성인을 본받으려면 먼저 그들의 생애와 사상, 특히 영성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기를 읽고 묵상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 성인전기가 잘 안팔린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우리 성인공경이 소흘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본적 이유는 성인공경에 대한 기본적 교육과 계몽의 부족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103위 성인축일에 대한 교육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상태이다. 최근 교황께서는 성사경신성성을 통해 우리 성인축일을「의무적 기념일」로 로마교회력에 삽입할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시성식에 버금가는 한국교회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교회력에서 대축일이나 축일은 주님의 축일, 성모축일, 사도축일 등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따라서 일반성인은 기념축일 밖에 못되는데 여기에는 기념을 해야하는 의무적 기념일과 기념을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자유 임의적 기념일의 구분이있다.
그러므로 일반성인으로서 의무적 기념일로 지정된다면 그것은 최대의 영광이다. 소위 포교지역의 나라들로서 이 영예를 차지한 나라는 지금까지 일본과 우간다 밖에 없다. 이제 한국이 세번째로 이 영예를 차지하게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과연 우리 교우들이 얼마나 알고있을지 대단히 의문스럽다. 오히려 우리 성인축일을 한국교회에처럼 세계교회에서도 대축일로 지내고, 그래서 의무적 기념일로 격하된 것을 아쉽게 생각할 교우가 없지않을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1859년 최양업 신부는 한국순교자의 조속한 시성을 염원하면서 순교자 공경과 이에 대한 성직자들의 계몽 부족이 그것을 지연시키고 있음을 개탄했다. 오늘날 시성의 의미가 약화되고, 또한 시성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같은 이유에서가 아닌지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 석 우<신부ㆍ한국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