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군중심리/오성백 신부 7

오성백 신부ㆍ안동교구 점촌본당주임
입력일 2011-06-30 10:02:26 수정일 2011-06-30 10:02:26 발행일 1984-04-15 제 1401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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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일본이 자기들 교과서에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해서 우리는 일본을 규탄하고 성토한 적이 있다. 택시 기사들은 일본인의 승차를 거부하고, 식당이나 유흥 음식점에서는 일본인의 출입을 막았던 것이다. 누가 시켜서 그렇게 했는지,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는 지는 잘 모르지만, 과거 민족적 수모를 당한 우리들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한국을 방문했을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당시 상황은 반일 감정도 가라앉지 않았고 문제의 뚜렷한 해결 방안도 없었고 역사 왜곡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나 시정한다는 뚜렷한 보장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중들은 연도에 나와 손에 태극기와 일본기를 들고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정치 외교적인 어떤 측면이 있었겠지만 나는 이율 배반적인 군중심리를 보는것같아 스스로 처량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약소 국민으로서 당하는 서러움이라 생각하면서도 언젠가는 우리 사회에서 요란한 구호나 규탄 대회나 궐기 대회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차분한 가운데 범국민적인 의식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침착한 가운데 정의와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

정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정의로와야 하고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이 평화를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요란한 세태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신앙인은 2천여년전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봐야 한다. 나귀를 타고 조용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군중들은 열렬히 환호했던 것이다. 손에 승리의 빨마가지를 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았다니 그 환호가 참으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고통의 최후 순간에『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쳐대던 사람들은 또 누구였던가? 역시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던 군중들이 아닌가! 예수님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군중들이 환호할 때도 배신할때도 구세주로서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 가신다. 오직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증거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침묵과 고뇌를 한 몸에 지닌 채 말 없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다. 오늘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는 우리들이 내일 배신자가 될지 염려스럽다.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나와 네가 변덕스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가? 「민심은 천심」이라 했고「백성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라고 했건만 때로는 진리와 정의가 왜곡되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가?

한때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애국청년처럼 보였다가 때로는 모두가 강도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산 가족들의 재회의 기쁨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 어떤 부인은 하루종일 TV앞에서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감정과 흥분에 도취되어 눈물만 흘려서는 안된다. 하루속히 눈물을 닦고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이 사라져야 한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이지만 대부분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추구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백성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이기에 정치 지도자나 종교지도자나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군중심리를 악용하는 무리는 진리와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추방해야 한다. 우리사회는 무엇이든지 한 곳으로 너무 기울어 지는 경향이 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현명함을 지녀야 한다. 『주여! 우리 모두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자 되게 하소서』

오성백 신부ㆍ안동교구 점촌본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