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어제와 오늘

김혜원 기자
입력일 2011-05-27 15:51:52 수정일 2011-05-27 15:51:52 발행일 1983-12-04 제 138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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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크라코프」의 무명소년이 성좌에 앉기까지
「노동자의 추기경」으로 추앙받아…한국민에 남다른 애정 보여와
나찌점령하에선 힘든 노동도…문학ㆍ어학에도 관심
지하 신학교서 공부-26세 때 사제품세
폴란드 공산화 직후「로마」서 귀국해 사목활동
내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이 땅에 찾아올 평화의 목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가 독립된지 2년 후인 1920년 5월 18일「크라코프」교구의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 애칭은 로렉으로 불리웠던 교황은 어린 나이인 9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세 때에는 형을 잃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교황은 퇴역장교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 1938년「코라코프」의 야겔로니카 대학교에 입학, 모국 폴란드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나찌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기 직전인 1939년 여름 학도병캠프에서 군사훈련도 받았던 교황은 그해 9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찌의 폴란드침공이 개시되면서 야겔로니카대학이 폐쇄되자 지하대학 폴란드어학부 2학년에 등록, 모국어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나가는 한편 그리스도교 민주단체(UNIA)와 제휴한 지하조직에 가입해 나찌의 박해 아래 고통받는 유태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나찌점령하에서 교황은 1940년「솔베이」화학공장소속「자크조벡」채석장에서 노무자로 돌을 깨고 운반하며 발파작업도 했고 1941년에는「보렉팔레키」공장에서 수질정화부로 힘겨운 노동을 하기도 했다.

억압된 상황 속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지하대학에 등록, 주경야독에 힘쓴 교황은 194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시신 앞에서 12시간을 꿇어 앉아있다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 42년에 지하 신학교에 입학했다.

44년「바르샤바」폭동이 가라앉아 주교관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한 교황은 종전후인 45년 3월 야겔로니카대학교 신학부에 등록해 사제의 길로 정진했다.

46년 11월 1일 사제품에 오른 교황은「로마」안젤리꿈 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연구하면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지도하는 마르셀 신부를 만나 노동사목을 익히기도 했다.

전쟁의 폐허에서 재건을 이룩하지 못한채 폴란드가 소련군에 점령돼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폴란드 교회는 탄압받기 시작했다.

7백여명의 성직자가 체포되는 등 폴란드교회의 탄압소식을 들은 교황은「내 자리는 내 민족과 함께 있다」면서 귀국, 48년 5월「니에고비츠」의 주임으로 부임했다.

48년 12월 16일 야겔로니카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교황은 52년 동대학에서 윤리학도 연구, 53년부터 58년 7월 4일「크라코프」의 보좌주교로 임명될 때까지 크라코프신학교ㆍ루블린대학교에서 사회윤리학ㆍ신학원론 등을 강의했다.

58년 9월 28일 주교품에 오른 교황은 62년「크라코프」대교구장 대리직을 맡으면서 제2차「바티칸」공의회에 참가, 종교자유와 현대세계에서의 사목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63년 12월 30일「크라코프」대교구장이된 교황은 64년 1월 13일 대주교품에 올랐고 67년 6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교황청의 성사경신성성ㆍ성직자성성ㆍ가톨릭교육성성ㆍ동방교회성성의 위원추기경으로 활약한 교황은 폴란드 내에서는「노동자의 추기경」으로 추앙받아왔다.

71년 세계주교시노드 상임위원이 된 교황은 76년 당시 교황 바오로 6세의 피정을 지도한바 있으며 77년 6월 2일 서독「마인쯔」의 요하네스 구텐베르그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75년「쇄신의 기초」를 출간키도 했다.

78년 9월 28일 급서한 요한 바오로 1세의 뒤를 이어 10월 22일 제2백64대 교황에 즉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79년 3월 4일 회칙「인간의 구원자」를, 10월 16일 사도적 권고「현대의 교리교육」을 발표했으며 80년 11월 30일「자비로우신 하느님」과 81년 9월 15일「노동하는 인간」등 회칙을 발표, 일치와 화해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교황으로도 알려져왔다.

교황은 80년「현대세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 가정의 역할」을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시노드를 소집, 주재했으며 81년 11월 22일 사도적 권고인「가정공동체」를 발표하기도 했다.

83년 1월 6일 예수의 구원 성업 1950주년을 맞아「구원의 특별성년」을 선포한 교황은「선교하는 교회의 화해와 회개」를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 시노드를 9월 29일부터 10월 29일까지 주재한바 있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81년 5월 13일 베드로광장에서 피격돼 세계를 경악케 했으나 곧 건강을 회복, 20차례에 걸쳐 35개국을 사목방문 하면서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로서 양떼를 찾는 목자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문학 및 어학에 관심을 보였던 교황은「안드레이 예비엔」「안드레이 그루다」라는 필명으로 시도 썼으며 연극동우회의 배우로도 활약했는데, 특히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 영어ㆍ불어 독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원의 특별성년을 한국 천주교회에 한 해 1년동안 연장토록 허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9월 27일 우리 순교자 1백3위의 시성을 승인, 세계교회사상 그 유래가 없는 신기원을 이룩케 했으며 다시「바티칸」밖에서는 처음으로 시성식을 거행토록 윤허하는 등 한국교회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보여왔다.

김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