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선 아직까지 부(富)의 사회환원만 이야기 해왔다. 사회에 되돌릴 대상을 부에 한정해서 입에 올렸다. 남보다 많이 가진 계층에게 당연한 것처럼 사회 환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회환원을 「가진 자」에 한정시킨 것은 편협된 생각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들 자신이다. 가진자만이 표적으로 삼기보다 우리 모두가 환원이 가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일찍 눈을 돌렸어야 했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 네게 걸맞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가 이 능력을 골고루 요구하고 있기에, 작건 크건 능력을 사회에 되돌리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차례이다. 이를 간과하고 부의 사회환원만 강조하는 것은 염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구현하는데 현대 사회는 그 어떤 정책이나 제도로도 역부족하다. 여기에 능력의 사회환원이 부의 사회 환원만큼 논의돼야 할 까닭이 있다.
인간에겐 광맥에 금이 드러나지 않고 존재하듯이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은 각자의 계발(啓發) 노력에 따라 잠재에서 현재(顯在)로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 나눠준 탤런트를 바로 찾아 쓰느냐는 각자에게 맡겨진 일몫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본향으로 돌아갈 때 남기는 부만 보고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묻히는 것은 육신만이 아니고 그 품에 깃들었던 능력 또한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나눌 수 없다는 말은 게으름의 핑계다. 우리에겐 가진 것이 누구나에게 있다. 바로 각자의 능력이다. 능력은 아낄 것이 못되며 아낄 수도 없는 것이다.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완숙한 것으로나 능숙한 것으로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배우고 키우며 얻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얻는 것이기에 그 사회에 되돌릴 필요의 당위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능력을 잠재에서 현시로 계빨해내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지만, 그 노력에 용기를 일깨워주는 것은 하느님의 힘이다. 목말라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이 힘을 느끼나 목마름을 몰라 기도할 줄 모르면 이 힘을 알 수가 없다. 이런 힘을 느끼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의 차이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삶은 다양한 형식으로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이다. 이 만남들이 의미 있는 것이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서로 나누는 자발적 나눔(share)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원봉사의 바닥 사상이다.
나눔의 대상을 부라고만 여겼던 시대는 지나갔다. 나눔은 결코 베푸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한가지 방편이다. 이런 나눔의 대상으로 능력을 택할 때 개인의 능력은 아름다운 자산으로 평가되며 고귀해지는 것이다.
이미 앞선 사회를 이룩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를 통해 능력을 나눠온 사실을 우리도 본격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자원봉사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만들어냈으며, 자원봉사라는 나눔의 방편을 개발해냈으며, 마침내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의 키워드가 바로 이것임을 실천으로 검증해냈다.
실제로 자원봉사는 지역사회의 세금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공공기관을 원활히 돌게 하는 효과를 입증했으며 그것이 곧 지역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날의 지역사회는 지역사회만으로 남아있지 않다. 지역 사회는 글로벌의 한 단위세포일 뿐이다. 인도의 한 빈촌에서 마더 데레사가 보여준 능력의 사회환원이 세계인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회에 환원된 능력은 반드시 보상된다. 환원된 부는 기껏 벽돌이나 동판에 새겨져 붙여지나, 환원된 능력은 자손이 살아갈 삶터가 아름다워질 때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이 세상엔 기억상실자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 위로와 위안이 절실히 필요할 때 그것을 떠올릴 추억을 저축하지 아니한 인생이다. 돈을 저축한 사람은 이자가 불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좋아하지만, 투억을 저축한 사람은 그 회상이 주는 보람에서 더없는 행복을 느낀다. 능력을 아낌없이 돌렸을 적에 이를 통한 만남이 떠올려주는 추억은 얼마나 큰 기쁨인다.
똑똑한 사람은 자기보다 행복해하는 사람을 더 많이 사귀고, 어진 사람은 자기보다 불행해하는 사람을 더 많이 안다. 능력을 나눌 대상은 자기보다 덜 행복한 사람들이다. 행복해하는 사람과 사귀려들면 비애가 오고, 불행해하는 사람과 사귀다 보면 보람이 온다.
결코 「가진 자」가 아니었으나 지닌 능력을 모두 다 사회에 환원한 대표적 실천자가 성경 속의 그리스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