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순절에 만난 사람] 누명쓴 재일교포 구명운동에 헌신 조만조 할머니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0-06-25 00:00:00 수정일 2010-06-25 00:00:00 발행일 1998-03-15 제 209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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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슬픔들 기도로 이겨냈어요”
결혼 앞둔 사위ㆍ딸의 「간첩죄」와 「불고지죄」 누명으로 시작된 옥살이 뒷바라지
민가협 결성, 억울하게 구속된 재일교포 석방에 앞장
일흔 노구 이끌고 지금도 구명운동 마다않아
올해로 희수(喜壽)의 나이를 맞은 서울 수유동본당 조만조(세실리아) 할머니.

75년 12월 사위가 될 이철(레미지오)씨에 이어 며칠 만에 딸 민향숙씨(마리아)마저 간첩 누명으로 감옥에 보내고 10여 년을 옥바라지로 살면서도 누구도 욕하지 않았다는 조할머니, 그의 삶은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가족, 나아가 수많은 타인들의 십자가도 함께 짊어져온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동경중앙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71년부터 고려도 정외과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이철씨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방문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딸은 그런 약혼자를 신고안했다는 이유로 3년 6개월을 차가운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사돈이 될 사위의 부모들이 사위의 구속소식에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두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해왔던 일이며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를 만들어 공동대표로 사위와 딸을 비롯한 억울하게 구속된 재일교포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던 일 등 조할머니는 자신이 거쳐 온 삶 하나하나를 분단의 슬픈 역사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일이라 여기며 자신이 아니면 이 고통을 감내할 사람이 없는 양 인내하고 있었다.

특히 사위와 딸의 옥바라지를 위해 안동과 광주교도소를 오가면서도 『주님과 함께 다니니 감사합니다』는 기도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조할머니는 오히려『예수님이 겪으신 십자의 위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더라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를 달라』는 간구로 숱한 슬픔과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런 조할머니의 기도가 하늘에 다다랐음인지 이철씨는 79년 무기로 감형을 받는 등 수차례의 감형을 거쳐 13년만인 88년 10월 3일 살아서 안동교도소를 걸어 나올 수 있었고 교도소 문을 나온 지 3주 만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민향숙씨와 정식으로 혼배성사를 올릴 수 있었다.

조만조 할머니는 그 이후로도 억울하게 갇혀 있는 재일교포들의 구명운동에 일흔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다니길 마다 않고 있다.

결혼 후 일본에서 살고 있는 딸 민향숙씨 가족도 조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며 이제는 조국이 그들에게 가한 가혹함을 용서하고 조국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