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대학을 졸업하면 장교로 군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장교로 지원하지 않고 장교보다 복무 연한이 짧은 사병으로 공군에 입대했다. 강릉에 있던 레이더기지에서 군생활을 하던 이 시절 나는 또 한번의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된다. 대대급 단위의 그리 크지 않은 부대였음에도 내가 몸담고 있던 부대에는 신학생이 서너명 있어서 그들과 교유하며 군에서도 신앙을 새롭게 해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힘든 가운데서도 잘 어울렸고 선임자들로부터 기합을 받는 중에도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등 늘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마음이 모였기 때문일까, 우리는 의기투합해 부대 내에 조그만 경당을 짓기로 하고 이를 몸소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인접해있던 미군 부대의 못쓰는 콘세트 건물을 인수받아 우리 부대로 떼어 와 손수 20평 남짓한 경당을 지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힘든 군생활 속에서도 소중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인사차 당시 서강대학교 총장이시던 데일리 신부님을 찾아갔는데 신부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학교에 일자리를 마련해주셨다. 어학실습실장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어학실습실을 맡겨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나도 최선을 다해 임했다. 재학시절 일찍이 신부님들로부터 배운 대로 철저함을 기하려 노력했는데 그런 내 모습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지독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2년 반을 학생들 사이에서 지낸 후 학교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때도 데일리 신부님의 배려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던 한 외국인 회사를 소개받았다. 한국인 30여명이 미국인으로부터 면접을 봤는데 영어 덕분에 나만이 그 자리에서 채용됐다. 그러나 그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후 딱 일주일만에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벌이 이외에는 아무런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데일리 신부님을 찾아뵈니 『그럴 줄 알았다』고 웃으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 소개해주신 분이 미국 가톨릭구제회 한국지부장이시던 캐롤 몬시뇰, 당시 안주교님으로 알려진 분이었다. 당시 서울 운니동 운현궁 안에 있던 가톨릭구제회 한국지부 사무실로 안주교님을 찾아뵙고 구제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곳이라는 말씀에 그 자리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봉급은 전 직장의 5분의 1도 안됐지만 나는 그제서야 내 자리와 내 일을 찾은 것 같았다. 1970년 5월 1일이었다. 그 때는 구제회가 한국전쟁 후 펼쳐오던 엄청난 구호사업을 마무리하고 그 다음 단계로 가난한 이들의 개발사업을 지원하던 시기였다. 내게 주어진 일은 전국의 가난한 지역을 방문하고 실태를 파악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지원여부를 결정토록 하는 일이었다. 월요일 오후에 서울을 떠나면 전국 방방곡곡의 사업현장을 돌아다니다 주말에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생활이 반복됐다.
하루에 한두번 버스가 다니는 산간오지부터 배가 없으면 꼼짝도 할 수 없는 섬마을, 나환자촌, 고아원, 양로원,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자모원, 간이의료시설 등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삶터를 오가며 종교를 구별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서는 까리따스의 정신을 배우기 시작했다.
젊었고 열정이 있었으며 빈곤과 비참의 현장에서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만났던 이 때가 나에게는 가장 활기찬 시기였으며 삶의 뜻을 세운 때였고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기 시작한 때였다. 지금도 가난의 현장에서 만났던 이들의 눈망울을 떠올릴 때면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이 불쑥불쑥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