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순간을 살며 영원을 꿈꾸는 인간 / 조규만 신부

조규만 신부(바실리오·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입력일 2003-01-19 10:33:00 수정일 2003-01-19 10:33:00 발행일 2003-01-19 제 2332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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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영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해가 또 지났다.

나이든 사람일수록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빠르다고 말한다. 한 해라는 것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다가 거의 비슷한 위치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시간의 단위이다. 오늘날 과학은 태양계 역시 우주의 어느 중심을 또 돌고 있다고 말한다.

지구는 언제부터 태양 주변을 돌기 시작했을까? 또 태양계는 언제부터 우주 중심을 돌고 있었을까? 「빅뱅이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우주가 생겨난 것이 150억년 전, 혹은 200억년 전이라고 말한다. 태양과 지구가 생겨난 것이 35억년 전, 또는 40억년 전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200억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시편 90, 10)의 인생을 사는 우리로서는 헤아려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숫자다. 인간의 역사란,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마치도 점과 같은 순간일 뿐이다.

순간의 순간을 사는 인간임에도 파란만장한 희노애락의 인생 여정이 펼쳐진다. 작가 박경리씨는 「최서희」라는 한 가상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500쪽 분량이 되는 16권의 「토지」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대단한 필력이다. 그만큼 할 말이 많은 인생사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한 인간과 인간의 인생이 얽혀서 올 한 해만 해도 교회 안팎으로, 나라 안팎으로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렇게 많은 사연이 새겨진 인생, 그렇게도 많은 아픔과 기쁨이 교차한 인생임에도 인간은 그 인생의 짧음을 안타까워한다.

『인생은 한 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시편 90, 5). 안타까워하는 마음 속에는 오래 살고 싶은 갈망이 들어 있다. 오래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염원은 동화의 맺음말에서 잘 드러난다.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다』

종교 역시 인간의 이러한 본능적 갈망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고 있다. 불교인은 인생의 찰라적 삶의 무상함에서 거듭 거듭 반복되는 윤회의 삶을 희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인은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고 있다. 대단한 희망이다.

영원이란 과연 무엇일까? 김홍섭 판사는 자신의 수상집 「무상을 넘어서」에서 말한 바 있다.

『설악산만한 화강암석에 천년 만에 한 번씩 와서 사뿐히 앉았다가 날아가는 작은 새의 발자국으로 하여서, 그 암석이 평지가 되기까지의 세월이 몸서리쳐지리만큼 길다 하자. 그렇다할지라도 그 길이가 역시 영원 될 수 없음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분명 천년, 만년, 억년의 해, 아니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의 그리고 불가사의, 무량수의 해를 보낸다 해도 그것은 영원이 아니다.

영원은 질적으로 시간과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시간에 얽매여 마치 대단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속도가 시간을 앞지른다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비로소 시간의 허약성을 파악해 냈다.

그 이후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공상해내고 시간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초월한 4차원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이미 중세 신학자들에게 시간이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에 불과하였다.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삼차원의 한 방식일 뿐이다.

인간은 꿈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성서 말씀을 꿈의 세계, 정신의 세계를 통해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고차원적인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다.

일찍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무에서 물질이 존재하게 되고, 물질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생명체에서 정신이 출현하고, 유한한 정신이 무한의 세계로 진입하는 세계의 진화를 관찰하면서 지적한 바 있다.

인간에게 최대의 두 가지 기적이란 무에서 유가 생겨났다는 것이고, 유한한 시간적 존재가 무한한 영원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참여할 수 있다면, 즉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보다도, 물위를 맨 발로 걷는 것보다도 몇 천 배, 몇 만 배 대단한 기적이다. 그것을 놓친다면 너무나 불행한 일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 16).

지구는 앞으로도 태양을 부지런히 돌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끝이 없다.

순간을 살면서 영원을 꿈꾸는 그리스도인! 그들은 과연 바라지도 못할 것을 감히 꿈꾸는 가련한 존재인가? 아니면 희망의 존재인가? 다사 다난했던 또 한 해를 보내고 무상한 한 해를 맞이하면서 시간을 넘어 영원을 그려보았다.

조규만 신부(바실리오·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