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폴랜드「트라코우」교외에 자리잡은 사회주의 시범도시「노와후타」는 계획된 도시답게 모든 것이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단 한 가지 교회가 없는 것만이 큰 흠이었다. 그러나 91%가 가톨릭 신자인 10만여 읍민이 끈질긴 투쟁 끝에 이제 12년 만에 이 마을에도 교회가 서게 됐다.
구 스탈린 노선정권은「크라코우」교외에 사회주의 도시 즉 노동자 도시를 만들어 여기에다 거대한 冶金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반동적인「크라코오」지역을 진짜 사회주의 도시로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교회는 그 계획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1956년 스탈린주의가 제거되고 고물카가 폴랜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권력을 잡게 됐을 때「노와후타」의 강철공장 노동자들은「바르샤바」당국에 교회를 요구했다.
이들은 교회 건설의 약속을 받은 후 읍 중심부에 터까지 마련해 놓고 설계를 현상 모집하여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구조의 청사진을 뽑았으며「크라코우」대교구에서는 성당 건설 기금도 모았다.
1957년 故 바지악대 주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맑스가와 소련 10월혁명가와 극장이 있는「마야코브스크」가의 교차점에 위치한 이 성당 터에 십자가를 봉헌했다.「바르샤바」방송은 드디어 건설이 시작됐다고 방송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9년 정부는 돌연 건축 허가를 취소하고 그 자리에 대신 학교를 세운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1960년 4월 노동자들이 봉헌한 십자가를 파 내는 것으로 시작해서 폭동은 연이어 일어나 폴랜드 최대 강철공장의 종업원 데모자들은 성당 터에서 시청에 이르는 거리를 가로질러「바리케이드」를 쌓고 시청에다 불을 질렀다.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세례로 평온을 되찾기는 했으나 성당 건설은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됐다.
1960년대에「바르샤바」의 비친스 추기경은 공산 정권이 새 교회 건설 약속을 깨뜨렸다고 공식으로 비난했는데 특히「노와후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65년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가 호전되자 보틸라 추기경(당시 대주교)은 정부 관리와 회담, 교회 건설문제를 협의했다.
1959년 5월 18일 마침내 보틸라 추기경은 새 교회의 초석을 놓게 됐다.
이 초석은 바오로 6세가 강복한 것을「로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자력으로 진행된 이 성당 건설엔 장비가 없이 신자들이 삽과 괭이 등 간단한 손도구로 기초를 파야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 여러 나라에서 도움을 뻗쳐 왔다. 오지리 가톨릭 신자들이 크레인과 시멘트 혼합기를 보내왔고 독일ㆍ프랑스ㆍ항가리ㆍ네델란드 등지에서 노력봉사를 위한 가톨릭 청년들이 몰려 왔고, 영국에서는 퀘이커 교도들까지 건너왔으며 플랜드 학생들이 이에 합세한 것은 물론이다.
이곳 가톨릭 공동체의 활동은 대도시와 맞먹는다.
10여만 명의 본당 신자들은 주로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인 젊은 부부들이다. 11명의 본당 신부들은 연평균 1천5백 명에 영세를 주며 1백 명의 장례와 4백 명의 혼배를 치른다. 주일학교 학생만 해도 1만3천 명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천미사를 드리고 헛간에서 주일학교를 경영한 어려움을 딛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새 성당 완공을 눈 앞에 보게 된「노와후타」본당 신부와 신자들은 마냥 희망에 부풀어 있다.【노와ㆍ후타ㆍ풀랜드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