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속회는 사제 혹은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회헌에 따라 혼자 혹은 가족, 형제적 공동체와 함께 일정한 조건을 가지고 생활하는 수도회를 말한다.
1947년 교황 비오 12세가 사도적 헌장 「섭리의 어머니이신 교회(Provida Mater ecclesia)」를 반포, 수도 생활 범위를 수도회 사도직회 뿐만 아니라 재속회까지 확대시키면서 교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게된 재속회는 법적 인가를 받은 비교적 자유롭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 단체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후 창설
「동정으로 어머니 되신 성마리아의 카테키스타회」. 「성모 카테키스타회」라는 약칭이 익숙한 이 재속회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게오르그 게마인더 신부(Georg. J. Gemeinder. S.V.D 신언회)가 제2차 세계대전후 극심한 혼란기를 겪으며 재건의 움직임 속에 있던 일본 사회를 경험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세상 속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며 세상을 그 내부에서 복음화 하는 재속회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설립했다.
전교지역에서 창설된 최초의 재속회로 알려진 성모카테키스타회는 명칭이 뜻하는 대로 「성자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그분의 뜻대로 생애를 바치신 동정 마리아를 봉헌 생활의 모범으로 하고, 깊은 모성애로 성자 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자신을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신 성모 마리아를 사도직 거울로 삼아 그분의 보호를 청한다」는 기본 영성을 드러내고 있다.
창립자 게마인더 신부는 1921년 말씀의 선교 수도회(신언회)에 입회, 1929년 5월 사제서품후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고베에서 1년 동안 생활한 후 아끼다에서 활동하다 젊은 여성들의 수양(修養) 모임인 『성모 자매회』를 결성, 교회에서 봉사할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는데 이것이 성모카테키스타회 창립의 계기가 됐다.
1941년 브라질에 부임했다가 1948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게마인더 신부는 본격적으로 성모카테키스타회 설립 계획을 진행시켰는데 때마침 비오 12세 교황이 1947년 2월 재속회에 관한 교령 「Probida Mater Eccl esia(섭리의 어머이신 교회)」를 반포하게 되면서 재속회 창립이 하느님 섭리와 시대에 적합한 판단이라는 의지를 갖게 됐고 교령에 맞는 재속회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50년 교리신학원 개교
그는 1950년 4월 성모 카테키스타 학원인 교리신학원을 개교했으며 1954년 2월 11일 나고야 교구장 승인을 받고 정식 재속 수도회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후 1955년 3월 25일 6명의 첫서원자 탄생를 탄생시켰고 1962년 제1회 총회를 개최, 최초 총장과 4명의 평의원 선출 및 관구 지구를 설립했다.
게마인더 신부는 1979년 8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선교 열의를 인정 받아 「성 십자가 훈장(Pro Ecclesia et Pondifice)」을 수여받았다.
성모 카테키스타회는 1982년 4월 20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모츠지 미호꼬, 나리따 도모꼬 두 수녀가 파견됨으로써 한국 교회에 첫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