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정평위 공개질의 답변서 내용을 중심으로
이회창 “사형, 점진적 단계 거쳐 수정 폐지돼야”
노무현 “유괴살해·가정파괴범에게는 시기상조”
권영길 너무 이상적 … 구체적 실천방안 부족
인식 관심 의지 “총체적 부실”
12월 19일 치러질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주요 후보들의 「생명·인권」 지수가 전반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내용은 속속 각 분야의 공약을 발표하고 있는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본지가 후보들의 공약을 「생명」과 「인권」분야에 국한해 가톨릭 사회교리 관점에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후보 대부분은 각종 사안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과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최영수 주교)가 주요 대통령 후보와 주고받은 공개질의에 대한 답변(본지 11월 24일자 참조)을 중심으로 각 당 후보들의 정책을 살펴보면, 「생명·인권」 분야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형제도폐지」 문제에 대해 각 당 후보들은 정평위의 입장표명 요구에 마지못해 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회창(울라프) 한나라당 후보는 『사형제도는 보상이라든지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회복하도록 해주는 현대사회의 교정제도의 원칙에 위배되는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보는 『사형제도 자체를 하루아침에 폐지하는 것보다는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조금씩 수정해 가고 차후 사회적 여건과 분위기 등이 이뤄질 때 완전히 폐지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밝혀 사형제도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는데서 한발 물러섰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사형제도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는데서 한발 물러섰다.
노무현(유스토) 민주당 후보는 사형제도에 대해 『절대적 가치를 갖는 인간의 생명이 재판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원상회복이 전혀 불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라는 인식을 피력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전향적으로 추진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노후보 또한 『유괴살해범이나 가정파괴범 등 흉악범에 대해서까지 폐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국민의 법감정을 고려해 사형제 폐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 가는 노력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흉악범에 대해서까지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권영길(가롤로) 민주노동당 후보는 앞서 두 후보와는 달리 사형제도가 법의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살인행위라는 교회의 입장을 적극 수용하고 「제한적 감형 불허의 무기형제도」 도입을 통해 사형제도를 대체해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나아가 헌법개정의 기회에 헌법상에 사형 금지를 명문화하겠다는 뜻을 공약화해 타 후보와 차별성을 드러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제한적 감형 불허의 무기형제도」도입을 통해 사형제도를 대체해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등 생명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권후보를 제외한 모든 후보들이 인간배아 복제와 종간 교잡행위에 대한 대통령의 예외권 조항에 경제논리로 일관, 찬성하거나 입장을 유보하는 모습을 보여 교회의 입장을 수용하는데 인색했다.
이회창 후보는 생명산업과 생명윤리의 조화로운 발전을 모색할 수 있도록 대통령 직속의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설치를 통해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 판단하겠다는 입장으로 논의를 비켜갔다. 노무현 후보는 생명 윤리적 검증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과 생명관련 연구에 대한 국가 지원을 포함한 적극적인 육성사업을 병행할 것을 밝혀 경제적 논리로 한발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권영길 후보는 대통령의 예외권 삭제와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로의 격상에 찬성하는 공약을 내고 아울러 경제적 이해로 생명문제에 다가서는 흐름을 막기 위해 국제적인 생명특허권을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정책을 밝혔다.
후보들의 생명.인권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부족은 각 당의 공약에서도 교회의 요구가 거의 반영되지 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나라당 정책공약위원회가 10대 국가개혁 과제로 제시한 공약에 따르면 각종 사회적 차별 철폐 등의 정책을 제시하면서 장애인, 노인 등에 대한 복지서비스 구축과 남녀차별 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의 제정을 통해 여성인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내놓고 있음에도 생명에 관한 정책은 찾아볼 수 없어 이에 대한 관심 부재를 드러냈다. 더구나 이후보의 경우는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아동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 노점상 등 소수계층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정책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정책선거특별본부가 확정 발표한 16대 대통령선거 핵심공약에 따르면 「바로 선 대한민국」등 4대 비전을 제시한 노후보의 경우 여성의 사회진출 지원을 비롯, 장애인 이동권·교육권·노동권 보장, 산업연수생제도 문제점 보완, 대체복무제도 등 현 정부보다 진일보한 인권정책을 담고 있지만 사형제도나 생명윤리에 대한 정책은 찾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장애인과 여성공약을 따로 내는가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영유아, 성적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소외된 계층을 위한 다양한 인권관련 공약을 내놓고 있음에도 구체적인 실현방안은 부족한 실정이다. 이로 인해 권후보의 정책은 내용이 「너무 이상적이다」「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나마 후보들의 생명·인권 분야에 대한 정견이나 정책이 종교계와 사회단체 등의 활동이나 압력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된 것이어서 이 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과 인식 부족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생명·인권관련 정책을 뒷받침해줄 예산 문제에 가서는 모든 후보들이 현실성 있는 예산 확보 방안을 밝히지 않고 있어 정책 실현에 대한 의지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안주리 사무국장은 『대선 주자들의 생명 의식과 인권에 대한 비전은 그야말로 초보적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어 사회를 선도해나가겠다고 나선 이들의 의식에 의구심마저 품게 된다』면서 『주요 정책의 공약화 과정에서 교회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