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신앙인이며 의사’ 안중근 좌담회

정리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8-10-16 수정일 2018-10-19 발행일 2018-10-21 제 311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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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뜻 따라 분쟁의 땅에서 평화 추구한 참 신앙인”
유교의 천명 정신과 가톨릭 신앙 융합해 실천
분쟁 지역을 평화지대로 바꾸는 것이 동양평화론
「안응칠역사」 상당 부분이 신앙·이웃사랑에 관한 내용
‘경천애인’ 충실히 실천하며 평화의 사도로 활발히 활동

김동원 신부

이경규 교수

가톨릭신문은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신앙인이며 의사 안중근을 조명하는 좌담을 마련했다. 이번 좌담을 통해 안중근 의거를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바라보면서 신앙인 안중근은 어떤 인물인지를 안중근 연구 전문가들로부터 들었다.

일시: 2018년 10월 12일

장소: 서울 명동 우리사랑나눔센터

패널: 김동원 신부(수원교구 천진암성지 전담)

이경규(안드레아)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사회: 장병일 편집국장

-장병일 국장(이하 장 국장): 안 의사는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 가장 먼저 인식되고 있습니다. 안 의사는 신앙인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동원 신부(이하 김 신부): 안 의사가 어떤 신앙인인지 뤼순감옥에 수감돼 있으면서 썼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안태훈 베드로) 권유로 입교했지만 나름대로 신앙을 연구해서 19세(1897년)에 빌렘 신부(한국명 홍석구)한테 세례를 받습니다. 그 전에 음주가무, 말타기, 호걸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다가 세례 받으면서 변화를 겪습니다. 미사 복사, 선교, 국채 보상운동, 의병 운동, 학교 사업을 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됩니다.

안 의사는 초기 한국교회 평신도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물입니다. 이벽 성조, 정약종 복자, 정하상 성인 등 초기 신자들의 신앙이 「안응칠역사」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과 서양 가톨릭을 융합해서 받아들인 인물입니다.

-장 국장: 현대 신앙인들은 안 의사의 신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김 신부: 안 의사는 내면에서 유교의 ‘천명’(天命) 정신과 가톨릭 신앙을 융합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단계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 의사는 수신제가 후 일본에 나라를 뺏기고 가만있지 않고 학교사업 등을 하면서 일제에 저항하고 치국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평천하를 이룬 것입니다. 곧 동양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안 의사는 ‘이토를 저격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나를 벌할 것’이라 여겼는데 이것이 천명사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경규 교수(이하 이 교수): 안 의사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가톨릭신앙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고, 이웃을 위해서도 헌신했던 내용들이 나옵니다. 안 의사의 세례명은 토마스인데 인도에 와서 선교한 토마스 사도를 본받아 선교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일본군에 쫓기며 풍찬노숙을 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부하 2명에게 대세를 주기도 했던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김 신부: 안 의사는 박해시기 현실 도피적이고 내세 중심적이었던 한국교회를 현실 참여적 성격으로 완전히 바꾼 인물입니다. ‘현실 사회’에서 민족의 구원과 동양평화를 추구했습니다.

-장 국장: 안 의사는 하얼빈 의거의 결과로 뮈텔 주교에 의해 살인자로 단죄된 후 김수환 추기경이 1993년 8월 21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봉헌한 미사를 통해 신앙인으로 복권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84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이 교수: 안 의사는 뮈텔 주교가 청계동공소와 해주를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고, 뮈텔 주교에게 선교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민립대학 설립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원칙은 정교분리로 정치로 인해 종교가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세 유지를 위해서 조선의 국권 회복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에 대해 신자가 아니라고 했으며, 안 의사를 뤼순감옥으로 찾아가 고백성사를 줬던 빌렘 신부를 뮈텔 주교가 정직시킨 모습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안응칠역사」가 늦게 발견돼 안중근의 신앙에 대한 조명작업이 늦어진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김 신부: 파리외방전교회의 정교분리 지침은 안 의사가 신앙인으로 불인정되는 데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였으니 살인자라고 뮈텔 주교는 단정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안 의사를 신앙인으로 복권이라기보다 회복시켰습니다. 이토 저격이 살인이라면 이토의 조선 병탄, 중국 침략을 합리화, 정당화 하는 것입니다. 안 의사가 신앙인이자 군인으로 이토를 저격한 것은 정당방위라고 봐야 합니다. 안 의사를 살인범,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인식입니다. 이토 한 사람으로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다는 것이 안 의사의 인식이었습니다.

-이 교수: 안 의사는 근본적으로 이토가 한국 국권을 빼앗고 동양 평화를 해치는 사람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안 의사는 교수형을 당할 때 동양평화 삼창을 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합니다. 또한 안 의사의 유묵 중 특히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의 ‘대업’은 동양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안 의사는 하얼빈 의거와 관련해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인 군인으로 만국공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옥중에서 투쟁하기도 했는데, 당시 교회 측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김 신부: 안 의사가 살인자로 단죄됐기 때문에 뮈텔 주교는 그에게 성사를 못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렘 신부는 그럼에도 뤼순감옥으로 찾아가 안 의사에게 성사를 줬습니다. 안 의사는 빌렘 신부로부터 유럽의 상황을 듣고 동양 평화의 근거지로 뤼순을 삼자는 의식을 갖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쟁 지역을 평화지대로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동양평화론입니다.

-이 교수: 동양평화론은 죽은 사상이 아니고 지금도 살아 있는 사상입니다.

-장 국장: 현대 신앙인들이 안 의사의 신앙에서 찾아야 하는 평신도 사도직과 선교사로서의 면모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김 신부: 안 의사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따라 실천했습니다. 현대인들의 신앙이 개인적, 가정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데, 남북한의 화해 같은 국가적 문제와 아시아 복음화를 비롯한 국제적인 차원에서 안 의사로부터 평신도 사도직의 모범을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이 교수: 안 의사는 신앙인의 본분인 경천애인을 충실하게 실천했던 참 신앙인입니다. ‘경천’(敬天)이라는 유묵도 남아 있습니다. 「안응칠역사」에 보면 옹진군민에게 돈을 빌려 갔던 전 참판 김중환을 서울로 찾아가 꾸짖고 돈을 돌려주겠다는 확답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억울하게 재산과 부인을 빼앗긴 이경주를 대변하며 이웃사랑을 실천에 옮기신 분입니다. 빌렘 신부를 도와 선교활동에도 적극 나섰을 뿐만 아니라 국채보상운동, 교육, 식산, 의병운동도 모두 평화를 이루기 위한 평화의 사도로서의 실천 활동이었습니다.

-장 국장: 안 의사 순국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는 물론 북한과 일본, 중국 정부의 공동 노력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해 앞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이 교수: 서울 효창공원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묘 옆에 안 의사 유해를 묻을 장소를 남겨뒀습니다. 안 의사가 사형 집행 전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고국에 반장(返葬)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후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주도로 유해발굴 작업을 한 적이 있지만 실패했습니다. 안 의사 묘지를 참배한 이의 증언에 의하면 뤼순감옥 동쪽의 공동묘지가 가장 유력한데,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다 발굴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 의사는 고무신을 신었고 침관에 모셨으며, 성물도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해서는 북한을 포함해 주변 국가와 유기적 관계 형성이 필요합니다. 또 관련 기관, 단체들이 후회가 없게끔 충분한 조사와 검토를 거쳐 발굴에 임해야 된다고 봅니다.

-김 신부: 안 의사 유해 발굴은 김일성이 가장 관심 가졌던 일입니다. 김일성은 안 의사를 항일투사로서 존경했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일본과 수교를 안 할 정도로 항일정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보다 먼저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교수: 김구가 북한에서 남북통일을 놓고 담판하면서 안 의사 유해 발굴에 대해서만은 합의를 이뤘습니다. 안 의사가 북한 해주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겁니다.

-김 신부: 우리가 나름 노력했는데 벌써 100년이 지나서 유해를 제대로 발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거의 불가능해도 희망을 갖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안 의사는 관도 예의를 갖추고 고향에서 보내온 수의를 입었다고 하는데, 공동묘지가 아닌 다른 묘지에 묻혔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이 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파급력을 우려해서 그럴 것입니다. 공동묘지만 찾지 말고 뤼순감옥 주변 방공호도 뒤져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장 국장: 안 의사 유해를 찾아야 하는 당위성이나 명분은 무엇입니까.

-이 교수: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순국선열들의 희생, 독립운동, 안 의사의 동양평화를 위한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 의사는 주변국가와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합니다. 안 의사 유해를 모심으로써 젊은이들의 국가관과 애국심이 보다 더 고양될 것입니다.

-김 신부: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은 남북한 화해와 일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하면 한국교회는 물론 북한 선교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장 국장: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 있는 동안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현재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이 교수: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공동체 수립의 자산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한중일이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사적 문제가 해결돼야 합니다.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를 지방정권으로 인식하는 논리를 펴고,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 못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동양 3국이 평화를 수립하는데 동양평화론이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 안 의사는 분쟁지역이었던 뤼순에 ‘동양평화회의’의 본부를 두자고 주장했습니다. 분쟁의 씨를 협력의 모델로 바꾸기 위해 동양평화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김 신부: 동양평화에 대해서는 이토 히로부미도 얘기했습니다. 이토는 일본의 무력에 의한 평화를, 위안스키는 중국 중심의 평화를 주장한 반면 안 의사는 가톨릭의 세계적, 도덕적 권위인 교황을 중심에 둔 평화를 주장했습니다. 그만큼 가톨릭 신앙에 철저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아직도 그로 인한 갈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동양평화론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동양평화론은 안 의사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안 의사 관련 단체들이 국내에 많지만 동양평화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안 의사에 대한 기록이 몇 줄밖에 실리지 않은 것도 개선돼야 합니다.

-이 교수: 일제 하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천주교 신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못했던 일을 메워주신 분이 안 의사입니다. 가톨릭의 위상을 살리신 분입니다. 안 의사는 민족정기의 화신이자 자기 목숨을 바쳐 정의를 실천했던 분입니다.

-김 신부: 2010년 안 의사 순국 100주년 행사를 중국 다롄에서 열었는데 일본 주교 두 분과 사제단, 신자들이 참석해 일본이 한국에 준 상처를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교수: 동아시아 공동체가 협력과 상생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의 화해와 평화가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남북 화해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안 의사가 말씀하신 ‘안중근의 날’이 왔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10월 12일 서울 명동 우리사랑나눔센터에서 대담 중인 패널들. 왼쪽부터 장병일 편집국장, 김동원 신부, 이경규 교수. 사진 최용택 기자

정리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