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바오로 6세 교황
‘가톨릭교회 현대화의 주역’
성 요한 23세 교황 뜻 이어 공의회 속개
모국어 미사·그리스도교 일치 노력 등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따른 교회개혁
불과 5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임기 중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의 뜻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그대로 이어졌다.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 교황이 선종하고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바오로 6세 교황은 자신의 교황명을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로 정했다. 이어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으로 착좌한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선포했다. 그리고 1965년까지 이어진 공의회를 통해 그는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으로 기록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오로 6세 교황을 일러 ‘위대한 키잡이’라고 칭송했다.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정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도록 이끄는 키잡이 역할을 함으로써, 그는 혼란과 분쟁, 갈등으로 가득했던 현대세계에서 가톨릭교회의 현대적 면모를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바오로 6세 교황은 1969년 한국교회 첫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을 임명했다.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1897~1978)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1920년 사제품을 받은 후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대학에서 문학을 배웠다.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공부한 뒤, 이듬해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잠시 머문 뒤 줄곧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했다.
1954년 그는 밀라노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처음으로 교황청을 떠난 그는 왕성한 사목활동에 나섰다. 전쟁으로 부서진 많은 성당들을 고치고 신앙을 잃은 노동자들 삶의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섰다. 1958년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추기경에 임명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요한 23세 교황이 선종한 뒤, 1963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공의회 속개를 선언했다. 요한 23세 교황이 시작한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현대화, 세계화의 발걸음은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이어졌고, 1965년 폐막 때까지 수많은 위대한 결정들이 이어졌다.
공의회의 절정에 이른 제4회기 때에는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세계주교시노드 설립이 이뤄졌다. 현대교회사의 가장 위대한 성과인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서, 전례 개혁과 미사 중 라틴어 대신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와 무신론과의 열린 대화가 가능해졌다.
그의 교황직 수행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위해 노력했고, 공의회에 여성과 수도자, 평신도가 입회하도록 했다. 교황의 삼중관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 학자로 선포했다.
그의 진취적인 행보는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공의회 진행과 후속 조치의 실행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불협화음은 그를 향한 엄청난 비난으로 쏟아졌다. 가혹한 비난에 그는 스스로 자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할 만큼 고뇌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교회의 기본 입장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선언하는데 추호도 타협이 없었다.
1978년 8월 6일 바오로 6세 교황은 여름 별장인 카스텔간돌포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