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36】Ⅲ 검색과 잠복시대 / 1. 기리시탄 검색제도 / 4) 배교서약서, 5) 불교개종 장부

입력일 2005-10-16 수정일 200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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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신부의 배교서약서. 中庵, 了順, 了伯의 사인이 있다.
기리시탄 적발 위해 전국민 불교개종 강요

4) 배교서약서

남만서사(南蠻誓詞)라고 하는 이 배교서약서는 배교한 자가 회심하여 돌아서면 벌을 받을 뿐 아니라 불치의 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서약하는 문서이다. 전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위로는 데우스, 산타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든 천사들과 성인을 걸고 다시는 기리시탄으로 회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모순 된 말이지만 박해자들은 이것으로 배교자에게 정신적 압박감을 주었던 것이다. 배교서약서가 전국적으로 행해진 것은 1635년부터이다. 배교한 신부 훼레이라(일본명 澤野中庵)와 아라키 료하쿠(荒木了伯), 고토 료준(後藤了順)은 후미에의 책임자가 되었고 배교서약서를 써서 제출한 것이 현재 나가사키의 서승사에 보관되어 있다.

5) 불교개종 장부

슈몬 아라타메 쵸(宗門改帳)라고 하는 이 불교개종 장부는 1640년 본격적인 기리시탄 적발, 처형 등을 목적으로 전 국민에게 강제로 불교 신자가 되게 하는 주민의 개종 장부이다. 이는 국민의 종교사상을 통제하여 막부체제를 유지하는 제도가 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1634년의 나가사키의 ‘平戶町橫瀨浦町人數改帳’인데, 이 기록의 1642년 장부에 조선인들의 기록이 많이 있다. 몇 사람만 예를 들어보면,

1)川崎屋助右衛門尉, 60세. 조선인, 1595년에 備前 岡山에 오다. 그 후 1614년에 나가사키의 上町에서 기리시탄이 되었으나, 采女 치세 때 浦町에서 배교. 대광사에 부탁함.

2) 위의 여보, 53세, 조선인. 1599년 肥後 八代에 오다. 1611년에 마카오에 팔려가서 기리시탄이 되다. 1616년에 귀댁, 나가사키에서 采女치세 때 배교, 대광사에 부탁함. 부부가 조선인임으로 동네에서 조사한 후에 증인을 세워 청원서를 받다.

3) 仁介의 여보, 68세, 조선인. 1592년에 나가사키의 今町에 와서 곧 기리시탄이 되다. 今町에서 河內 치세 때 기리시탄을 버리지 않아 운젠고문을 받고 남편과 함께 배교, 홍태사에부탁함. 동네에서 조사한후 부부 함께증인을 세워 5인조에서 받아들임.

이 조선인들은 1592년부터 시작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와서 이곳저곳에 살다가 기리시탄이 되어 나가사키에서 살고 있었다. 1620년경부터 박해가 심하여 많은 조선인 기리시탄들도 신앙을 버리고 불교도가 되어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저한 검색 하에서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신앙을 지켜온 장한 조선인 기리시탄이 있었다. 1650년 비젠(備前)의 오카야마(岡山) 성 밑의 나카스카 동네에서 직업이 말을 모는 조선인 이치뵤에(市兵衛)가 고발되어 감옥에서 옥사한 일이 있다. 기록을 보면 ‘조선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6~7세에 오카야마에 연행되어왔다. 그 후 오카야마를 떠나 몇 개의 다른 지방에서 고용살이를 거쳐 또 다시 오카야마에 되돌아와 적발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치뵤에는 1603~1613년 사이에 주인의 권유로 기리시탄이 되어 있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