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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한국문화] 3. 출판 인쇄술과 한국 교회 / 이원순 ①

이원순·서울사대 교수
입력일 2020-06-01 16:26:10 수정일 2020-06-01 16:26:10 발행일 1974-06-23 제 91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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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층 전도 위해 한글 교리서 편찬
한글 교서 사본, 교인에 유포, 입교자 교육에 사용

한국 세계 인쇄 사상 특수 지위 차지
박해에도 목판 인쇄소 마련, 복음 전파에 주력

세계 인쇄문화 사상 한국은 특이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사용하였고 그 후 활자를 계속 발전시켰으며 인쇄술을 개선해 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고래로 기록을 즐겨히 하였던 전적의 전통을 지닌 민족으로서 역대를 두고 많은 기록과 문헌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북방 호족과 서방한족의 침략이 거듭되는 가운데 병화로 탕진되어 고대ㆍ중세의 기록은 매우 희귀해졌다.

그러나 근세 이후에는 수다한 문헌이 현전되어 그 전통을 입증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출판사업이라고 하기에는 적합치는 못하나 국가적인 도서편찬사업이 활발하였고 또한 귀중 도서의 관각이나 방각이 자못 성행되어 많은 도서가 시정 항간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적을 통해 연구 수용되어 확립된 것으로 창설 후 한국 교인들에 의해 계속 교리가 연구되었고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또한 각종 교서가 필사 유포되었다. 마침내는 목판 인쇄도 다량 출간되어 교인 사회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신심을 굳혀 주는 한편 근대의식을 심어 주는 공을 쌓았다. 교회는 의욕적인 교리서 편술 간행 사업을 위하여 박해시대 비밀리에 본판 인쇄소를 마련하엿고 그것이 병인박해로 파쇄되자 국외에 활판 인쇄소를 마련하였다. 그 후 개화 문명의 도입을 보게 된 후 그 시설을 국내로 이설하여 각종 교서를 인쇄하여 그리스도 복음의 교도와 근대적 신앙생활의 정착에 큰 공헌을 하였다.

본고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사본 유포와 교서의 편술 번역 인행 그리고 현대적 출판 인쇄사업을 개관하여 그 문화사적 의의를 해 보기로 한다.

인행 출판에 앞서 귀중서가 유포되는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사본의 작성 유포이다. 서양 중세 수도원이 고전 문헌의 서사에 힘써 사본을 작성하여 수도원에 장치하여 두었던 것이 훗날 게르만 민족 개명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례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 후기 사회의 선각적 독서층의 학문적 연구의 결과로 창성되었다. 그러기에 교회 창립의 핵심 인물은 물론 초기 교인들은 교양을 갖춘 양반 계급과 중인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명ㆍ청에서 도입된 한문으로 번역된 이른바 한역 교서를 그대로 독파하여 신앙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서의 사본의 유포는 먼저 이러한 명ㆍ청 등 서학서가 전사되어 비밀리에 서학도 서교인들 사이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양반ㆍ중인 교인들만이 아니라 천주교 신앙이 농민층 부녀층으로 확산됨에 따라 그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그들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언문교서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언문교서 즉 한글로 편술된 교리 서적이 작성되었음을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이 한글 교리서인「주교요지」를 엮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1795년 조선 왕국에 잠입한 주문모 신부가「낮에는 우리말로 책을 적고 밤에는 교무를 집행」하였음을 보아서도 입증된다. 중국으로부터 가져 온 한역 교리서를 가지고 그 내용을 소화하여 한글로 교리서를 편찬하거나 또는 직접 그러한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이루어진 책이 몇 종에 이르는가 는명확치 않다.

이와 같은 한글교서의 필요는 당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입신하는 농촌 서민층들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절실하였다. 그러기에 그러한 한글교서를 사본화하여 교인 사회에 유포한 지도적 교인(1801년 박해 후 교회 재건에 헌신한 최 모루스, 1816년 순교한 김계원 1827년 체포된 신대보)이 있었고 나아가 한글 교리서를 서사하여 그 사본을 판매함으로써 신덕을 쌓고 그것을 생업화한 교인(1827년에 순교한 김군미, 이경빈의 예 1835년 옥사한 이성삼)도 있었다. 1838년 12월 조선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는 기구서의 번역이 시작되었음을 포교성성 장관에 보고하고 있는 바 이는 12단과 천주성교 공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많은 한글교서의 사본이 교인 사이에 유포되어 교리 지식 심화나 입교교육에 사용되었다. 1846년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그가 한글 천주교서(諺綠天主敎語)를 가지고 있었다고 황해감사가 중앙정부에 보고하고 있다.

김 신부도 한글교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뒷날 1866년 병인박해 때 압수 소각된 여러 종류의 교리서도 모두 한글교서였음을 볼 때 한글교서의 저술과 서사 유포는 매우 활발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생명을 천주대전으로 인도하였고 그리스도 사랑에 대한 개명을 촉진하였으며 또한 한글의 유포 보급에 일조를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원순·서울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