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영 신부ㆍ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라틴어 판을 충실히 번역하겠다는 전례위원회의 방침은 전례헌장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성찬기도문 중「기념」이「기억」으로 바뀐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
“설과 한가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설과 더불어 이에 걸맞는 미사 기도문과 독서 선택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의 정신에 따라 1969년 라틴어판 미사경본이 나오고 이를 번역하여 사용하기를 25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9년간에 걸친 노력의 대가로 우리 실정에 맞춘 미사 통상문의 발간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니,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새 미사 통상문의 개정작업에 있어 책임 주교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쇄신 정신과 전례 신학 사상을 최대한 담고자 노력하였다는 말로 이 작업의 의미를 대신하고 있다. 따라서 전례학을 전공한 글쓴이로서는 이 작업의 결실인 새 미사 통상문을 유심히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고, 여기서 드러난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서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승인으로 이제 다 결정된 미사 통상문에 대해 어떤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가을 정기 주교회의에서 확정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개정작업에 참석한 이들과는 다른 의견도 있음을 전하는 것이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 나으리라 생각되어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새 미사 통상문 개정작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쇄신 정신과 전례학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라틴어로 되어 있는 『로마 미사경본』을 가능한 한 충실히 번역한다는 원칙도 내놓고 있다. 글쓴이로서는 이 두 원칙이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례헌장은 고전 로마전례의 전통적 자산에 충실하면서도 『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각 나라와 민족의 실정에 맞게 전례를 고치는, 한마디로 말해 전례의 토착화를 위한 헌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다시 말해 트렌트 공의회 이후 4백년간 지켜온 『동일한 형태의 로마전례』라는 원칙을 깨고 로마전례를 각 민족의 문화적 특성과 상황에 맞춰 개정하라고 강력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례헌장인 것이다. 따라서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나온 전례서들은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적용하면서, 스스로는『editio typica』라는 말로 이 예식서들이 각 주교회의가 토착화하여 내놓을 새 예식서들의 모범판, 표준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전례 헌장의 기본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라틴어 판을 충실히 번역하겠다는 전례위원회의 방침은 전례헌장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면에서 새 미사 통상문은 트런트 공의회의 『유일한 로마전례』의 원칙에 충실한 작업의 결과라고 보아진다. 물론 충실한 번역을 한 후에 토착화 작업에 들어간다는 전제가 있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이런 점에서 새 미사 통상문에서 진정한 의미의 전례의 토착화 시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나칠까? 거꾸로 말하면 토착화는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아닐까? 자이레 교회, 인도 교회, 필리핀 교회 등 세계 도처에서 자기네 실정에 맞는 미사 통상문을 만들어 교황청의 승인 아래 시범적으로 토착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라틴어 예식서를 세계에서 가장 말 그대로 번역한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항간의 지적을 생각해 본다면, 새 미사 통상문을 토착화 작업의 한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유럽 교회들 마저도 앞다투어 자기네 고유의 전례서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우리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토착화 작업은 많은 전례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각 민족의 고유 문화에 대한 긍정적 판단에서 시작된다. 즉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 문화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우리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로마 예식서의 충실한 번역은 토착화를 위한 준비 단계는 될 수 있어도 토착화 자체는 아닌 것이다. 물론 현대어법에 맞게 고치고자 시도했다는 것 자체는 아주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례헌장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토착화 작업은 라틴어 예식서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번역을 전제로 하며 이것을 위해서는 로마 전례에 대한 충실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정확한 번역이란 단어 그대로 번역함을 가리키지 않고 그 의미가 살아 있는 번역을 뜻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자비송(기리에)의 경우 새 미사 통상문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대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로 바꾸었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한국말이 『자비를 베풀다』는 한자어로 바뀐 것 말고는 큰 변화를 찾기 힘든,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다. 한국말은 언문이라 해서 괄시하고 한자를 고상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잘못된 언어 습관이 우리도 모르게 한글 표현을 한자 표현으로 바꾼 것은 아닌 지. 물론 한자 표현이 더 점잖다고, 그래서 더 심오한 뜻이 있다고 여기는 현재 우리의 언어 습관을 무시할수는 없지만, 우리말을 가다듬는 일 자체가 바로 토착화의 한 과정임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문제는 여기에만 있지 않다. 자비송은 참회나 애원의 뜻을 전혀 담고 있지 않은, 원래 신(神)이나 고관을 맞이할 때 외치는 일종의 환영 구호였다. 우리 미사 통상문 안에서도 고백의 기도와 사죄경 다음에 자비송을 하고 바로 이어 대영광송을 하도록 배치함으로써, 자비송이 자비를 청하는 의미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환영하는 찬미 환호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불쌍히 여기다』는 표현을 고칠 바에야 아예 그 뜻을 살려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또는 『만세, 주님』하는 식으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한글을 한자어로 바꾸는 것은, 컴퓨터 용어를 한글로 표현하려는 현재의 젊은이들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님』이란 호칭에서도 글쓴이는 문제를 느낀다. 유럽교회는 전례 중에 친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이인칭『너』란 표현을 하느님께 사용한다. 유럽어는 대부분 존경을 드러내는 인칭대명사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친밀감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이 멀리 있는 신, 무서운 신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다정한 분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물론 우리가 유럽 교회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들과 우리 문화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님』에서 보듯 님이란 호칭은 자칫 하느님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자칫 예수님이 『인자한 하느님』에 대해 계시한 것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새 미사 통상문 안에서 가장 크게 문제될 부분은 성찬기도문 중 성찬제정 말씀에 나오는 표현이다. 『너희는 이 예를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는 말이 『너희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바뀌었다. 새 표현은 라틴어 문장을 글자 그대로 번역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라는 표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정확하고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본다. 두 표현 모두 같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념』이 『기억』이란 말로 바뀐 데 있다. 우리가 지내는 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 대한 『기념』 이다. 즉 성찬례(미사)는 2천년 전의 예수 사건을 최후의 만찬이라는 형식을 통해, 예식을 거행하는 바로 『이 순간의 사건』으로 만들며, 앞으로도 이 예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이 빠스카 신비의 본 뜻이 『완성』되는 그날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기념』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차원을 다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영어와 라틴어를 위시한 대부분의 유럽어는 이런 의미의 단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이 의미를 충실히 담고 있는 『anamnesis』라는 성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요즘의 전례학 추세이다. 우리말에는 『기념』이란 말이 바로 이 단어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질 뿐, 성찬례(미사)가 뜻하는 바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성찬제정 말씀 다음 부분에서는 『기념』이란 표현을 쓴 전례위원회가 왜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는 『기억』이란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는지 글쓴이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예를 행함으로써』가 『이를 행하라』로 바뀐 부분 역시 문제가 있다. 물론 라틴어 원문에는 『예식』이란 말이 없고 다만 대명사 『이것』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새 미사 통상문의 번역 원칙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자는 것이라면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 의미를 살려 번역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예식』이란 말이 들어가는 것이 이 부분의 본래 뜻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본다. 일부 사람들이 걱정하듯이 이 말이 들어간다고 해서 예식주의에 빠질 염려는 거의 없고, 또 예식은 자신이 담고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예식 자체를 경시하는 것 또한 옳지 못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새 미사 통상문에 관계된 문제점들을 몇 가지 지적해 보았다. 그러나 글쓴이로서는 이것보다는 앞으로 계속 전개될 전례서들의 개정작업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특히 미사경본의 개정이 큰 숙제로 남아 있는 지금, 글쓴이는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먼저, 로마 예식서를 단순히 현대어에 맞게 번역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보다는 각 기도문이 뜻하는 바 그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라틴어 기도문의 무조건적인 번역보다는 우리 실정에 맞는 기도문의 작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로, 이탈리아 교회의 미사경본에 나오는 기도문들 대부분이 로마 미사경본의 기도문들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기도 어려울 만큼 완전히 다른 기도문들임을 밝힌다.
둘째, 로마 미사경본은 졸속이 편찬된 관계로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드러나고 있는데, 한국 교회는 바로 이 부분을 보완, 편찬함으로써 토착화 작업에 발을 내디딜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주일 복음은 3년 주기(가, 나, 다해)로 편성하면서도 그날 미사의 주제를 이루는 복음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야하는 입당송, 본기도, 영성체송은 하나 뿐이다. 이 때문에 복음과 나머지 기도 사이에 존재해야할 유기적 연관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새 미사경본 편찬 때, 복음과 연관을 맺는 기도문들의 작성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전례주년과 연관시켜볼 때,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설과 한가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더불어 이에 걸맞는 미사 기도문들과 독서 선택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 명절을 그리스도교화 함으로써 하느님이 우리나라에 언제나 역사하고 계심을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신앙의 표현이자 그 토대가 되는 예식을 담고 있는 예식서를 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왕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로마 예식서의 단순한 번역서가 아닌, 우리 민족의 정서와 상황을 담고 있는 예식서가 나오기를 바란다. 이 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새 미사 통상문에 대해 비판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바로 전례의 토착화라는 대명제를 실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한국적인 전례서들이 나오기를 기도한다.
◆ 정종휴ㆍ전남대학교 교수
다원주의 인정될때 전례생활 풍요
상황따라 구ㆍ문ㆍ라틴어 골라 써야
1. 머리말
우리말 미사 통상문 개정안이 발표되었다. 지난 9년간의 준비기간 중에 수정안만도 11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개정 작업팀의 노고를 우선 높이 평가한다.
2. 특색
보도된대로 새 미사 통상문에는 크게 세가지 특색이 있다. 첫째는 「라틴어 원문에 충실」한 새로운 용어법이다. 일반인들도 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 감각을 살린 것이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미사 통상문은 개정될 때마다 라틴어 원문에의 충실도가 떨어지는 번역으로 세계 도처에서 문제되었음을 감안하면, 한국 천주교회의 이러한 자세는 우등상감이다. 특히 사도신경 중의 「고성소에 내리서어」를 「저승에 가시어」로 바꾼 것은 개정안의 백미이다.
「저승에 가시어」는 백미
둘째, 하느님의 위격을 정확히 구분하는 표현법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드러낼 때는 「천주」를 쓰고, 성부를 뜻할 때는 「하느님」, 성자는「그리스도님」, 성신은「성령」으로 나타낸 것이다.
최근들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급격히 왜곡되고 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본성만 일방적으로 강조되어, 그리스도라는 같은 위격 안에서 일치되어 있는 신적인 본성은 은폐되거나 침묵되거나 부족하게 표현되는 그리스도론이 난무한다. 한편으로는 「성령의 배타적인 강조」경향이 있다. 잊혀진 「성부」와 오해받는 「성자」의 이면에 무조건적인 「성령」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인간이해의 잘못이라면, 개정 통상문안의 하느님 표기법은 하느님이 오직 그리스도로, 자칫 한 인간 예수로 축소되어 버리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경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깊은 일이라 하겠다.
기왕이면 격조높은 표현
셋째, 구어체로의 전환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정도는 받아들일 만한 구어화이다. 미사 전례상의 맨 마지막 말 「천주께 감사합니다」를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기 보다는 「하느님, 감사하옵니다」로 바꿀 수는 없었을까? 기왕이면 격조높은 표현이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제언
응송을 화답송으로 한 것은 좋으나 「알렐루야」를「복음 환호송」으로 바꾼 데는 뭔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느낀다. 「알렐루야」는「아멘」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우리말화 할 필요가 없을 정도요 또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 아닌가? 레지오 마리애, 글로리아, 세나뚜스 등등 가톨릭교회이기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몇가지 표현이 있다는 것은 자랑의 대상일지언정 굳이 개정의 대상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호텔」과 「택시」같은 말 때문에 우리말은 순수성을 잃고 있지 않는가? 알렐루야가 뭐냐고 물을 때 뜻을 가르쳐 주면 그만인 것이다. 「천주교회」는 굳이 「가톨릭교회」로 바꾸면서. 「알렐루야」를 「복음 환호송」으로 바꾸려는 저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여」를 「그리스도님」으로 바꾼 것도 마음에 걸린다. 호칭으로서의 「여」가 현재의 어법으로는 동격이나 손아래 사람에 대한 것이기에 아예「예수님」처럼 「그리스도님」으로 바꿨다고는 하나 실은 별로 안쓰이는 「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직한 사유가 아니었을까?
문어체는 무조건 나쁜가
형식적인 「문어체」는 나쁘고 현재의 언어생활을 생생하게 반영하는「구어체」가 좋다는 관념이 있다. 그러나 전례용어라는 것은 일상속어가 아니라 뜻이 고정된 고전문어(古典文語)가 이상적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 전례용어는 어디서나 구어가 아니라 문어였다. 예수께서도 성전안에서는 일상어와는 다른 히브리 말을 쓰셨다고 한다. 정착한 고전 문어는 어느 시대나 변함없이 통용되지만 현대적 구어는 시대와 더불어 변하여 몇 십년 지나면 통용되지 않게 된다. 이번 성령강림 축일에 불리는 「오소서 성신이여」(Veni creator spiritus)라는 성가를 보자 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불리워져도 뜻은 그대로이지 않는가?
한국인들의 언어생활상의 변화가 미사 통상문 개정작업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뒤집어 말하면, 언어생활상의 변화에 무관한 「고정적인 문어체의 미사통상문」도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얼마 안가 다시 바꿔야 할 현대 한국어 미사 통상문도 좋지만, 수십년가도 뜻이 그대로일 고전 문어체 통상문도 무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라는 말이 있지만 더러 「부친」이라는 표현을 씀이 의미의 강조일 수 있듯이, 최근의 어법과는 다른 다양한 전통적 표현법은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례상의 다원주의를 강조하고 싶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꿇고 용서와 도우심을 청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사드리며, 그 사랑의 위대함을 찬양하는데 어찌 한가지 방식의 전례문만 있어야 할 것인가? 최근의 다원주의 열풍은 그런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문제는 「정당한 다원주의」인 것이다.
개정안이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로 하였는데, 이 보편성은 결코 획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기묘하게도 공의회 이후의 다원주의는 모든 다원적인 것을 허용하되, 지난 2천년간 교회의 시간적, 공간적 보편성의 눈에 보이는 유대라고 할만한 것들을 무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획일주의가 되어 버렸다.
통일성안의 다양성 인정
가톨릭 전례의 통일성 안에서 가능성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은 『비록 사제일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전례에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변경하지 못한다』는 전례헌장(22조 1항, 3항)의 경고이다. 보다 풍요로운 전례생활을 참으로 바란다면 구어체와 문어체 통상문, 일정한 경우에는 라틴어 전례조차 스스럼 없이 대할 수 있는 분위기 역시 함께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전례헌장은 교회의 공식 용어가 여전히 라틴어이며 공식 전례성가는 그레고리안성가이며 각국어로 된 성가는 이와 더불어 쓰일 수 있다고 선언함을 상기할 일이다.
4. 마무리
미사 통상문이 개정되었으니 주요 기도문과 성가, 예식서 등도 전면적으로 개편될 것이다. 구어와 더불어 문어적 표현의 가치, 정당한 다원주의가 앞으로의 개편작업에 반영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갖가지 미명아래 거룩한 것을 파괴하고 교회의 모든것을 범속화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날로 기승를 부리는 마당에 이 점 특히 유념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