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 마리애 수원교구「천지의 모후」꼬미씨움이 3월 19일자로 상급 평의회인「레지아」다위로 승격됐다. 서울 (74년 9월 25일), 부산 (78년 11월 10일)에 이어 세번째로 레지아 조직을 갖춘 수원교구는 레지아 승격과 함께 중부 (수원시내), 나부 (안양지역), 북부 (평택지역) 등 3개 지역에 꼬미씨움을 설치, 평의회 조직을 확대하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효율적인 활동과 단원 저변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수원교구 꼬미씨움의 레지아 승격을 계기로 수원교구 레지오 마리애가 성장해 온 발자취와 현황을 알아본다.
수원교구의 레지오 마리애 역사는 수원교구 설정보다 4년이나 앞서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원 최초의 레지오 마리애 조직은 59년 2월 수원 북수동 본당에서 창립된「능하신 동정녀」쁘레시디움이다.
당시 수원 시내의 유일한 본당으로 서울교구 소속이었기 때문에 서울교구 레지오 마리애 역사가 수원교구 레지오 마리애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수원교구 설정 이전에 수원 레지오 마리애 조직은 서울교구 산하에 잇으면서 40여개의 쁘레시디움과 꾸리아 조직까지 완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구설정 다음해 1월 19일 이 조직을 바탕으로 즉시 교구 꼬미씨움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원 레지오 역사는 서울이 기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수원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것은 평신도에 의해서 라고 볼 수 있다.
복수동 본당 신자이며 73년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까지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주도해온 최상빈(안드레아)씨가 서울을 왕래하면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 매료, 당시 북수동 본당 보좌이던 이종철 신부 (現화서동 본당주임) 에게 쁘레시디움 조직을 요청했다.
이종철 신부는 전임지인 인천 답동 본당 (59년당시는 인천도 서울교구관{할}이었음) 보좌재임시 답동본당 부인 쁘레시디움과 학생 쁘레시디움 지도신부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쁘레시디움을 조직하기가 용이했다.
평신도의 하고자 하는 원의와 보좌 신부의 경험이 수원 레지오 마리애를 탄생시킨 것이다.
최상빈씨의 용청을 괘히 받아들인 이종철 신부는 당시 북수동 본당 총회장 송인섭(요셉)씨에게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교본을 주면서 레지오 마리애 설립을 촉구했다.
그러나 송회장은 총회장의 일을 하면서 레지오 마리애 조직을 주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조성시 (프란치스꼬) 씨가 조직준비를 맡아줄 것을 권하자 조성지씨는 최상빈씨 등과 협의, 남자 9명으로 59년 2월 북수동성당에서「능하신 동정녀」쁘레시디움을 창단했다.
「능하신동정녀」쁘레시디움 창단 임원진은 조성지(단장), 박용호 (부단장), 안두호 (서기), 최상빈 (회계), 씨 등으로 수원 레지오 마리애의 초석을 놓았다.
「능하신 동정녀」에 이어 그해 7월 17일에는 여성 쁘레시디움인「상아탑」이 두번째로 창단되었으며 8월22일에는 혼성 쁘레시디움으로「하늘의 문」이 설립되었다.
이어 평동공소 (現세류동본당) 에「평화의 모후」쁘레시디움, 고색동공소 (現 고색동 본당) 에「샛별」쁘레시디움이 각각 창단되었다.
또한 그해 11월 복수동 본당에서 고등동 본당이 분가, 신설되면서 최초의 쁘레시디움인 북수동「능하신 동정녀」쁘레시디움이 분리, 11월 23일 고등동 본당에「사도들의 모후」쁘레시디움을 만들엇다.
「사도들의 모후」쁘레시디움에 이어 안성에도 쁘레시디움이 조직되면서 이들 쁘레시디움 간부들은 서울 흑석동꾸리아 소속으로 매월 꾸리아 워례회에 참석하기위해 서울을 다녀야만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수원에서 서울까지 왕복하려면 교통이 불편하여 수원꾸리아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울 꼬미씨움도 이러한 수원의 어려움을 감안, 쁘레시디움이 조직된지 만 1년이 조금 못된 이듬해 1월17일자로 수원「천지의 모후」꾸리아를 승인했다.
8개 쁘레시디움, 90명단원으로「천지의 모후」꾸리아가 탄생되던 날 꾸리아 설립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교구장 노기남 주교, 안양 본당주임 구신부가 참석했으며 북수동 주임 임종구 신부, 서울 흑석동 꾸리아지도 이경재 신부와 서울 꼬미씨움 간부들이 교구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수원「천지의 모후」꾸리아는 63년 교구설정 다음해인 64년 1월 19일「천지의 모후」꼬미씨움으로 승격됐다. 꼬미씨움 승격당시 현황은 3개 꾸리아, 50개 쁘레시디움, 행동단원 6백 69명, 협조단원 1천 2백 39명으로 성장해 있었다.
레지아 승격전인 금년 2월 23일 현재 레지오 현황은 20개 꾸리아에 쁘레시디움은 2백 45개에 달하며 행동단원 3천 4백 28명 협조단원 4천 5백 78명이며 교구내 45개 본당 중 42개 본당에 레지오가 조직돼 있다.
교구설정에 이어 꼬미씨움으로 승격한 수원 레지오 마리애는 꼬미씨움 승격이후 한동안 치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64년 꼬미씨움이후 수원 레지오는 오히려 교회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못해 70년도까지 단원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60년대후반 수원 레지오가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서도 레지오 간부들의 숨은 노력으로 수원 레지오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소생하기 시작했다.
71년 수원 꼬미씨움이 수원 서울농대 강당에서 개최한 레지오 창설 50주년기념 대회는 수원 레지오가 소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기념대회를 계기로 레지오 마리애는 활기를 되찾아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78년 5월 광주 무등체육관에서 개최된 레지오 마리애 한국도입 은경축 행사에 단원들이 대거참석, 레지오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지아 승격과 함께 5월 5일 수원공설 운동장에서 수원 레지아가 주최하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 60주년기념 제 2차 민족복음화대회는 수원 레지오 발전에 분명히 새로운 전기률 마련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