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각에서 벌이는 뜻 있는 운동 중 하나가 ‘즐거운 불편’이다. ‘즐겁다’ 함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믓하고 기쁘다”는 말. ‘불편함’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괴로움”이고, “어떤 것을 사용하거나 이용하는 것이 거북하거나 괴로움”이다. 어느 뜻으로 봐도 정반대인 두 용어가 함께 해 오히려 흐믓함과 기쁨은 극대화된다.
이 운동은 위기에 처한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해 벌이는 자발적인 시민운동으로서 인간 문명이 위협하는 지구 환경의 몰락을 막자는 일이다. 궁극적인 환경보호는 인간 스스로 사고 방식과 생활양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구인 전체가 벌일 일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환경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우선 남녀상열지사. 데이트 비용을 위해서 부모를 들들 볶고, 산 책 또 사고, 지 맘대로 등록금 인상하고, 고단한 알바도 불사하며, 일가친척 가가호호 시도 때도 없는 문안 인사를 드린다. 불편하고 번거롭던 일이 기다림과 설렘의 의미가 된다.
‘즐거운 불편’의 절정은 헌신적인 부모의 노고이다. 애낳고 키우기는 불편함과 고통 그 자체이다. 입덧은 기본, 엄청난 산고 후에도 밤잠 제대로 못 자며, 걸핏하면 응급실로 뛴다. 교육비 걱정에 외식 한 번 못한다.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게 어디 불편이랴. 살포시 짓는 아이의 미소 한 줄에 천하를 얻는 부모의 마음에 불편은 기꺼운 즐거움이다.
성공을 향해 뛰는 직장인들에게서도 우리는 그런 자세를 발견한다. 후일 얻게 될 보수와 명예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많은 직장인들은 즐겁게 달린다. 성공한 직장인에게 일은 억지로 해야 하는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일 자체를 즐기고, 그 대가로서 성공이 주어진다.
‘즐거운 불편’은 윤리적 삶에도 적용된다. 바른 삶의 지침이 윤리 도덕이다. 그에 따라 본능과 욕심을 제어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때로는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성숙함에 따라 즐거움의 경지로 넘어간다.
때로 우리는 신앙 조차 불편하다고 느낀다. 세속의 가르침은 따르기 편하고 구미에도 맞지만 고지식하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 신앙은 현대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불편은 현대인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문명의 발달은 불편을 해소하고 편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불편한 종교와 신앙을 자기 임의대로 편리하게 만든다. 그것이 세속화와 안일한 신앙생활로 나타난다.
필자는 신앙에서도 ‘즐거운 불편’의 자세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인가를 억지로 참아내야 하는 인내심 차원이 아니라 불편함을 압도하는, 신바람 나는 믿음의 발견이어야 한다.
교회는 바로 이 점에 신경을 써야 한다. 권위와 강제, 의무가 동원되는 계명의 엄수가 아니라 자발적 친교와 축제가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활성화돼야 한다.
오늘날 과연 어느 누구에게 강요되는 권위가 유효할 것인가. 신앙 행위가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일깨워주기 위한 봉사의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박영호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