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기획/특집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77. 창조와 하느님의 섭리 (하)

입력일 2019-09-05 09:43:39 수정일 2019-09-05 09:43:39 발행일 1987-04-12 제 1550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우리와함께 계시는 하느님

3, 여기 희망과 절망의 위기에 우리의 희망의 근거를 엄청나게 강화시켜주는 하느님의 말씀이있읍니다. 그하느님의 말씀은 되풀이해서 상기해도 항상새롭고 인간적 견지에서는 거의 믿을수 없으리만큼 너무나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요구와 대결할때 만큼 위대함과 매력을 지니는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없읍니다. 하느님은 여기계십니다.

그분은「엠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입니다(이사야7, 4). 그리고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형제이신 나자렛의 예수안에서 하느님은『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삼으셨다』(요한1, 14)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시간속에 있는 교회의 역사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범과 성신의 능력에 의해 인도되어, 하느님 현존의 징표들을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찾고 검토하고 제시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충분히 말할수 있읍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인간을 짓누르는 정체불명의 중압에서 인간을 건져내어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결정적인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인간을 맡기기 위한 하느님 섭리의 은총과 의미를 세상에 선포하고 줄 수 있으며 교회는 세상에 선포하고 주기를 위하며 교회는 세상에 선포하고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 제자들의 신앙과 문화의 유산을 이루는 단순한 표현들로 해서 그리스도교 어휘는 풍요로와집니다. 하느님은 보신다, 하느님은 아신다, 하느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현존안에서 산다는 것, 하느님은 삐뚤삐뚤한 줄에 똑바로 쓰신다… 등은 간단히 말해서「하느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서는「하느님의 섭리」기록

4, 교회는「하느님의 섭리」를 알리고 전합니다. 인류의 사상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긴했지만 그거슨 교회가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을 그런 분으로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활동과 구원적 개입이 풀수없이 서로 묶여있다는 것, 그들은 영원으로 부터 결정된 단 하나의 게획의 일부분을 이룬다는 것을 당신 백성의 역사속에서 계시하셨을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섭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전체로 볼 때, 창조에 의한 하느님의 자연에 대한 개입과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사랑으로 새로와진 세상속에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는 구원에 의한 하느님의 더욱더 놀라운 개입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의 섭리가 기록된 최고의 문헌이 됩니다. 성서는 사실 창세기 창조에 대한 장들과 구원사업과 특별히 더 관계있는 장들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으며 예언서들, 특히 이사야서와 소위 창조에 관한 시편들과 역사 안에 일하시는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바오로의 깊은 묵상속에서(특히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 참조) 하느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으며 세상속에서 하느님의 징표를 찾으려고 열심인 지혜서들과 하느님 안에서 세상의 의미를 찾는데 완전히 열중해있는 시편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으며 세상속에서 하느님의 징표를 찾으려고 열심인 지혜서들과 하느님 안에서 세상의 의미를 찾는데 완전히 열중해있는 시편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읍니다. 결국 섭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은 단순히 종교철학의 한 장(章)이 아니라 신앙이 욥의 위대한 질문과 욥과 같은 모든이들의 질문에 하나의 대답을 주는것 같습니다. 따질 권리를 두둔함으로써 이서을 더 정교한 신학의 확실성안에 정박시켜 이성 자체를 정당하게 대우하는 완벽한 전망하에 그렇게 합니다.

이 면에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지치지않는 신앙의 반성과 만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구원(久遠)의 진리영역내에서 항상 새롭게, 그리고 새로운 용어로 섭리에 대해 자문하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려는 교회의 노력을 이용하면서 우리는 성전을 적절히 참고할 것입니다. 제1차와 제2차 공의회들은 보배로운 성령의 목소리들입니다. 그것을 무시할것이 아니라 묵상해야하며 그사상의 깊이 때문에 놀랄 것이 아니라 죽지않는, 생명을 주는 진리의 수액(樹液)을 환영해야 합니다.

「섭리」는「초월적 지혜」

5, 모든 심각한 질문에는 심각하게 잘 추리한 건전한 대답을 해야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특히 하느님의 섭리가 어떻게 위대한「창조」사업에 들어가는가 그리고 하느님 활동의 당야하고 현실적인 부요함들을 자명하게 해주는 그긍정에 들어가는가를 봄으로써 하나의 주제의 다양한 면들을 다루게될 것입니다. 「섭리」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사랑의 보살핌의 첫수용자로서, 동시에 그분의 지성적 협조자로서 하느님 계획에 참여토록 인간을 부르시는「초월적 지혜」로서 나타나는것이 이것에서 따라나오는것입니다.

섭리와 인간의 자유

「하느님의 섭리」와「인간의 자유」와의 관계는 정반대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통교관계입니다. 우리의「미래운영」이라는 심오한 문제조차도 하느님의 계시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섭리적 빛을 발견합니다. 그빛은 그신비를 본래대로 보존하면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구원의지의 보상이 됩니다. 이런 전망에서「하느님의 섭리」는「악과 고통의」현존으로 부정이되기는 커녕 섭리가 어떻게 악에서조차도 선을 끌어낼수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수있게 해주는, 우리 희망의 보루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세상의 진화와 진보」에 관한 하느님의 섭리에 쏟는 큰 빛을 되새길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초월적시야로 세상속에[서의 섭리적 하느님의 그치지 않는 지혜로운 활동의 최종점을 취합니다. 『지혜가 있거든 이일을 깨달아라. 슬기가 있거든, 이뜻을 알아라. 야훼께서 보여주신 길은 곧은 길, 죄인은 그길에서 걸려넘어지지만 죄없는 사람은 그길을 따라 가리라(호세아1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