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외신화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에 불가리아 개입”

입력일 2019-04-22 10:47:25 수정일 2019-04-22 10:47:25 발행일 1991-06-02 제 175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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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동구장악 방해 때문”

저격범 아그자, 법정서 주장
지금부터 10년전 터키출신의 극우파 회교도청년 메메트 알리 아그자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저격, 절명케 할 뻔한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전세계의 관심은 과연 그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는가, 아니면 모종의 사주를 받고 범행을 했는가에 모아졌었다.

사건발생 후 1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3차례의 재판까지 거쳤지만 아그자의 범행이 단독범행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배후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어쩌면 영원히 미제로 남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당시 철저한 반공입장을 취하고 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암살음모에 소련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건 발생일인 81년 5월 13일 직후부터 떠돌았었다.

이 같은 추론은 그러나 법정에서도 입증 되지는 못했으며 지금 또다시 대두되고 있다. 종신형을 복역 중인 감방에서 아그자는 교황이 모국인 폴란드의 자유노조에 대해 굽히지 않는 지지를 보냄으로써 동구에 대한 소련의 장악을 위태롭게 함에 따라 불가리아 비밀경찰이 교황을 암살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터키인들을 고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여행암호명, 접촉사실 등에 관한 정보를 꾸준히 폭로하고 있으나 때로는 그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기까지 하고 있다.

폴란드의 자유 노조는 소련의 동구장악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폴란드에 강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교황은 만일 폴란드가 침공당할 경우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 모국으로 갈 것임을 크렘린 당국에 경고했다는 보도는 파다했다.

당시의 이 같은 상황은 헨리 키신저 전 미(美) 국무장관이 지난 82년 12월 교황 암살기도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데 대해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도 남음이 있다.

키신저는 당시 “교황 암살음모에 불가리아인, 나아가 소련, 안드로포프가 개입돼 있다는 증거는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저격사건 이전 불가리아에서 오랫동안 머문바있는 아그자는 재판당시 배심원들에게 교황 살해 음모는 소피아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꾸며졌음을 믿어 달라고 요청했다. 수분 후 그는 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어달라는 엉뚱한 요청을 배심원들에게 했다.

법정 관계자들은 당시 아그자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아주 영리한 인물로 아마도 누군가에게 암호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세간에 떠돌던 ‘불가리아 연루설’은 입증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불식된 것도 아니었다.

결국 3명의 불가리아인과 3명의 터키인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탈리아 법정은 판결문에서 이들의 무죄를 완전히 확신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들의 유죄를 증명할 수 없을 뿐이라고 밝혔다.

1년 뒤 열린 항소심도 이 같은 판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최근 ‘불가리아 연루설’은 지난달 불가리아 당국에 의해 다시 제기됐다.

불가리아 당국은 공산통치 시절에는 아그자와의 연계설을 부인했었다.

첼류 첼레프 불가리아대통령은 전임 공산지도자들이 이 음모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조사를 위해 불가리아 정부는 당시의 경찰 서류를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워싱턴D.C에 소재한 ‘민주주의 연구소’의 앨런 와인스타인을 단장으로 한 한 민간위원회는 교황저격 사건에 대한 새로운 조사를 시작했다.

첼레프 대통령은 이탈리아 TV와의 회견에서 “불가리아 정부는 진실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는 다만 그 사건이 최종적으로 규명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와인스타인 위원회와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자신이 지난 10년간 불가리아의 공모가능성에 관해 여러 번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실토하면서 “나는 불가리아 공산정권이 그 같은 짓을 했을 가능성에 조금의 의구심도 갖고 있지 않으나 만일 불가리아 정부가 이 사건에 가담했다면 확실히 문제는 그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교황은 저격사건 2년 후 교도소로 아그자를 찾아가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에 관해 일체 밝히지를 않았다.

교황은 최근 한 측근에게 “한손은 나를 쏘았고 다른 한손은 나를 구했으므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교황 저격사건이 성모마리아가 포르투갈 어린이들에게 처음 출현한 1917년 5월 13일의 기념일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는 파티마의 성모가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고 믿고 있다.

<외신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