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것은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때까지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홍안의 외국인 젊은 신부가 큰 뜻을 품고 이땅에 발을 디딘지 56년. 이제 백발조차 찾기 어려운 노사제로 변모하기까지 한국의 양들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쳐온 약목 본당주임 정묵덕 (베네딕또회ㆍ84歲ㆍ서독인) 신부가 금년 5月로 수도서원 회갑을 맞이했다.
「한국인을 사랑한다」「한국을 사랑한다」외국인으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런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외모는 비록 벽안이었지만 한국시골의 촌노를 연상케는 그는 맘씨좋고 푸근한 때로는 엄한 구식 할아버지 신부였다.
『50여년 전만해도 성당에는 남녀가 벽을 사이에 두고 따로 앉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고 세태의 변화를 지적하는 정 신부는 또 교우들이 옛날에는 매일 조만과(아침저녁기도)와 주일 파공(주일날 일하지 않는 것)도 열심히 지켰는데 요즘은 주일미사는 바치지만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것 같다고 노사제다운 우려를 아끼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최고령의 사제로 알려진 정 신부가 한국에 오기는 1925년. 1898년 독일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사제 수도성소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 이었던 정 신부는 독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베네딕또 수도회에 입회, 수련생활후 한 신부로부터 한국에 대한 강의를 듣고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기로 결심했다.
정 신부는 이후 나름대로 한국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 그리고 당시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노 안셀모 신부와의 서신왕래를 통해 선교사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1924년 서품과 동시에 한국에 파견된 정 신부는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서 한국신자를 사목하게 됐다. 25개 공소를 사목하면서 해방과 6ㆍ25를 맞은 정신부의 북간도 생활 25년은 바로 형극의 25년이었다. 바로 러시아 국경 밑이라 행동의 제약을 받았고 日本人들로부터의 간첩취급, 공산치하에서의 강제노동, 그리고 옥살이 2년후 다시 연길교구로 복귀했으나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으로 양들을 잃어버렸고 나중에는 먹을것 조차 없어 고생하다가 1951년 독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두고온 산하와 양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5년후인 1956년 정 신부는 다시 입국, 입국한지 3주만에 성주본당에 부임했고 가천ㆍ낙산본당 주임을 거쳐 78년 일단 은퇴를 했으나 1달후 김천 평화동 임시주임을 계기로 약목 본당 주임을 맡아 84세라는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뛰고 있다.
정 신부의 사목의 특색은 공소사목. 북간도에서도 그랬지만 공소를 많이 설립해서 소공동체 위주의 사목을 하면서 잦은 가정방문을 통해 쉴새없이 신자들과의 유대를 갖는 일이다.
『의심없는 믿음, 그리고 건강은 실로 놀랍다』고말하는 한 측근은 몇 년전까지만해도 오토바이로 가정방문을 할 정도로 대단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쉴새없이 일하는 것이 천성인양 본당을 돌보면서도 틈만나면 채소를 가꾸고 믿음을 가꾸듯이 꽃을 가꾸는 노사제 정신부는 그의 전생애를 불태웠던 이땅에 뼈를 묻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면 소망』이라고 조용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