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가이아나 인민사원 신도들의 대량학살의 비극을 전후로 이들을 구출키 위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 뒤늦게 밝혀져 주목을 모으고 있다.
가톨릭의 움직임은 인민사원 신도와 가톨릭신자 친척간의 갈라진 틈을 메우러 노력한 예수회 신부들과 전직 가톨릭신자 국회의원ㆍ수녀외과의ㆍ가톨릭신자 어머니、그리고 공포의 살인 마지막 비극장면을 목격한 멜러웨어주「도버」의 군목들이 포함돼 있다.
가이아나 예수회지부장인 바로우 신부에 따르면 인민사원 신도들 중 많은 수가 한때 가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교과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바로우 신부는『그 신도들 전원이 미국시민들로 가이아나인은 한사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또 그 사원이 멀리 떨어져있어 인민사원 내 신자들과 거리감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1월 18일 거의 모든 인민사원 신도들이 집단 학살적 자살로 죽기 전에 예후회원들은『우리에게로 오기로 결심하는 인민사원 신도들을 상담하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바로우 신부는 라이언조사단과 함께 한 가톨릭신자어머니가「캘리포니아」에서「죠지타운」에 왔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인민사원부락에 거주하는 아들 브리안의 소식을 듣기위해「죠지타운」에 머물러있었기에 가톨릭신자인 라이언 의원과 다른 네 명의 미국시민들이 살해된 현장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한다.
바로우 신부는 브리안의 어머니가 몇 달 전 자기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편지를 자기한테 보냈었다고 말하고 편지에서 그녀는『브리안을 설득시켜 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한다.
이 부탁을 받고 바로우 신부는 그녀가 이곳에 오기전 몇 번 시도해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브리안의 어머니는 18일 비극이 있기 전 날 단파라디오를 통해 아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때 브리안은『어머니、나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빨리 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전역에 전해진 후에도 여전히『브리안의 음성듣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있었다』고전했다.
그 다음으로는 이 인민사원에서 의료상담역을 맡기로 했으나 사원측이 비행기를 제공하지 못해 결국 비극을 모면한 수녀외과의가 있다. 「필라델피아」출신으로「죠지타운」에서 일하고 있는 리구오리 수녀는『10월중에 인민사원에 가서 매 일요일 마다 캠프를 순회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고 그러나 자기가 가지 못 한 것은『사원측이 순회에 필요한 비행기를 제공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가이아나 비극의 가장 몸서리쳐지는 일들 중의 하나인 9백12명의 시체를 확인하고「델라웨어」주「도버」공군기지로 운반하는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중 가톨릭이- 군목이 2명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인 이간 신부는 이 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최대한 돕고 있다고 밝히면서 11월 26일에는 이 들을 위해 미사를 보헌하고 초교파적인 예식을 3번 거행했다고 전했다.
한편 가이아나의 비극현장에서 장남과、차남、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 중 가족 7명을 잃은 마이크 카터씨는 자신의「보이세」의 성마리아 본당 보좌인 페리에스 신부를 찾아와 자신과 자기 아들 딸들이 인민사원에 적극 가담했던 지난 날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민사원이 처음에는 좋게 보였으나『존즈를 비롯한 지도층이 점차 광신적으로 변하면서부터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기들의 광신을 발산할 장소를 찾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려는 자유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여러분은、자신의 원의와 여러분이 참여하려고 하는 단체의 장래성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젊은이들은 이점을 숙고하고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확정짓기까지는 카터가족이 인민사원에 가담한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번과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