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가 대희년 맞이 3권 「은사 쇄신과 어둠의 세력」을 편찬, 최근 출시했다. 이 책은 성령의 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의 세력을 분별하고 물리침으로써 더욱 굳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실천적인 지침서이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열심히 공부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며 추천한 이 책을 3회에 걸쳐 요약 보도한다.
악마는 신화인가 실재인가?
악마는 살아 있는 비뚤어진 영적 존재이다. 이러한 실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그것을 허위 실재의 존재로 보고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알 수 없는 원인을 개념적으로 환상적으로 의인화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정의하신 대로 악마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거짓말의 아비』(요한8,44-45)였다.
악마론에 관한 교회의 자세는 분명하고 확고하다. 악마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성서와 교회의 온전한 가르침에서 떨어져 나간다. 교회가 마귀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과 복음의 요구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사탄은 하느님의 적수가 아니다. 하느님과 악마를 경쟁하는 두 절대자, 곧 서로 겨루는 선신과 악신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의 절대자이시며 주권자이시고 초월자이시다. 이와 반대로 악마는 하느님의 한낱 피조물이며 존재론적 실제로는 본래 선하나, 창조에서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며 종속하는 기생충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메아리며 해석이다.
성서는 교도권이 조명하고 확증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해석자로서 제일 먼저 관심을 갖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죄에서 구해내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에 자양분을 주고 튼튼하게 해주는 모든 것으로서 더욱이 성사에 의지함으로써 적극적인 예방으로 악마와 싸운다. 이 가운데에서 성체성사는 모든 성사의 중심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치유와 해방의 최고 샘이 된다.
교회와 「해방시키는」성사생활
각 성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것은 교회의 행위에서 그 효능이 최고 수준에 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현존은 바로 「교회의 신비」의 핵심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헌장 48항)라 부르기도 하고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시며 온 인류와 일치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교회헌장 1항)라고도 부른다.
교회의 성사는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행위에 있다.
그러나 비록 성사가 자효적(exopere operato)이라 하더라도 성사를 결코 자동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성사를 준비하고 받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얕보는 것, 우리의 삶에서 요구되는 그리스도인다움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양심을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성사에 참여하기를 게을리 하거나 최소화 한다면, 우리 삶의 첫째 샘이며 정상적인 샘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이다.
「죄악의 신비」에 직면한 교회
해방은 근본적으로 또 우선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에서 구해 내는 것이다. 악마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바로 죄 자체이다. 그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의 자유를 감소시킨다. 죄의 종살이는 인간의 모든 기능, 곧 이성, 의지, 행동, 감정에 두루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노예화는 그 영향권이 광범위하고, 그 형태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악마는 인간이 하느님을 신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환영한다. 악마가 즐겨 쓰는 방법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를 곧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공격하는 것이다.
인간이 믿음으로 살면 살수록 악마의 공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믿음은 최상의 안전장치이다.
죄와 직면하는 교회
현대인은 더 이상 죄의 종교적 차원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서 죄의 개념 자체가 위험스러울 정도로 약해지고 있다. 행동과 반응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며, 두려움 없는 신심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음의 요구가 울려 퍼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인지를 용기와 상상으로 함께 모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알렐루야는 참된 것이 못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