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의 진위(眞僞)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에대해 고고학적인 자료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이와함께 로마의 교회와 세계에서 가장 큰 성전에 서있는 역사적 기초는 견고한 것인가?
매년 수백만의 신자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경배하고 있고 근 2천년동안 전통과 신앙이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지금보다 더 많은 방문객(순례객)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 경배할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순례객들이 베드로 대성전의 죽음의 도시(지하무덤)로 내려가서 발굴현장을 둘러 보고 있는 지금도 고고학자들과 사학자들에게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는것 같다. 그리고 서로간의 견해차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심각한 논쟁으로 불꽃을 튀기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무덤이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 할지라도 로마 교회의 기초나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활동했으며 그를 통해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건설되었고 네로 황제때 베드로 사도가 순교했다는 사실은 다른 근거를 통해서 충분히 증명되었으며 전문가들도 이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묻혀 있었느냐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서기 64년 또는 67년과 4세기 콘스탄틴 대제때의 첫 대성전을 건축하기까지의 기간 사이에는 증명할수 없는 빈틈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고고학적으로 철저히 조사했다 하더라도 완전하고 명확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있는 것이다.
교황 삐오 12세는 1940년부터 1951년 까지 역대 교황들의 지하무덤을 발굴하도록 했다. 그래서 전 서독 국회의원인 루드비히 카아스의 지휘아래 4명의 고고학자들은 베드로 대성전 아래 죽음의 도시(지하무덤)를 12m를 파 들어갔다. 결국엔 발굴단의 목적지인 무덤의 맨 끝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단은 한 유물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이 유물조각은 고대 문헌에서 사도의 무덤이라고 묘사된 것이었다. 또한 이 중앙무덤을 향하여 다른 모든 무덤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발굴단은 이 중앙무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시신을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에 관해 논쟁이 시작되었다.
로마의 비문학 전문가인 말가리다 과르두치는 계속해서 새로운 책을 발간하면서 항상 같은 논리로 발굴단이 엉성하게 조사했다는 것과 무리한 결론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말가리다 과르두치의 주장은 카아스 박사가 기념물의 옆방에서 발굴된 뼈들을 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매우 복잡한 이론을 통해 이 뼈들은 서기 3세기에 일어난 그리스도교 박해때 임시로 세바스참 까타꼼바에 안전하게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래 무덤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르두치는 베드로 대성전 지하 유리통석에 보관되어 있는 뼈들이 베드로의 유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르두치의 이론과 비판에 고고학자들의 대응도 옛날부터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과르두치가 비문학교수로서 문자연구에 공헌이 많았던 점을 인정은 하지만 발굴 결과들을 직접 조사한 일이 없고 간접적으로 배운것이며 발굴사실들에 대해 아주 부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바판하면서 과르두치를 공박했다.
당시 발굴단 가운데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예수회 학자 안또니오 페루아 신부는 선종하기전 자신의 9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새로운 이론은 아무도 보여 주지 않았다. 학자들은 베드로의 무덤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계속 토론을 해야 할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로마를 순례하는 신자들은 그들이 텅빈 베드로의 무덤앞에서 경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지 또는 전시된 뼈들이 베드로 사도의 것이라고 믿든지 이러한 문제는 신자들의 신심에 맡겨야 할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