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복음생각] (206) 가장 중요한 계명/김영남 신부

김영남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입력일 2011-06-03 00:00:00 수정일 2011-06-03 00:00:00 발행일 2000-11-19 제 222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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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31주일
마르 12,28~34
“이웃 사랑은 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는 계명의 당연한 귀절”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라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우물쭈물하시지 않고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그런데 예수님은 질문자가 묻지도 않은 「둘째 계명」에 관해서도 말씀하신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잇는지를 보여주신다. 이 점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하며 하는 율법학자의 다음 말에도 잘 드러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낫다』.이 말은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랑(자애)이다』라는 호세 6,6을 연상시키는 말씀이다(마태 9,13과 12,7 참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율법학자의 반응과 율법학자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에서 보여지듯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핵심 가르침을 재 천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이 첫째 계명으로 인용하신 『들어라, 이스라엘아(히브리어로 「셔마 이스라엘」)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명 6,4-5의 말씀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에 기도로 바쳤던 신앙고백적 계명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기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처럼,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셔마-기도」는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의 여정을 동반하는 기도였다. 히브리어로 쓰여 있는 성서를 보면 신명 6,4의 처음과 끝 글자가 대문자로 인쇄되어 있을 정도로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경건한 유다인들의 삶 속에서 이 신명기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얽어매는 「계명(법)으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위로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말씀은 계명이기 전에 우선 그들에게 베푸셨던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를 회고시켜주는 「사랑의 말씀」이었고 괴로운 처지에 있던 그들에게 「힘」이 되었던 말씀이었다. 사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위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을 말하기 전에 먼저 과거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해 길게 상기시키고 다. 즉 성서에서는 「하느님께 대해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하여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한결같은 사랑으로 응답할 요청을 받고 있다. 이 요청은 진정한 사랑이 요구하는 「의무」요 「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한 이 사랑의 요청과 의무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의 요청과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베푸시는 「약하고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성전(성소)에서 거행되는 예식 시간 동안에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성전 밖에서의 일상 삶에서는 「하느님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이 산다면, 그는 「목숨을 다해」하느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극히 짦은 시간 동안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웃사랑」의 계명은 「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은 경신예배만 강조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레위기에도 잘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레위기의 말씀(레위 19,18)이다. (참조: 레위 25장의 희년법, 루가복음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구약성서에 이미 계시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그 큰 줄거리에서 보면 너무나 분명한 것 같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참조: 갈라 5,15 로마 13,8-10 1고린 13장 1요한 4,7,16).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분명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친절하고」,「사랑스럽게」대하는 것조차 어렵다. 매일 매일 삶을 같이 아누고 있을 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 「착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조차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보아서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인내심 깊고, 도량이 넓으며, 너그러운 사랑으로 넓혀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기만 하지 않고 당신의 온 삶으로써 그 가르침을 사셨다. 과연 그분은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셨다!』

김영남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