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토마스)의 유배와 희생이 수많은 박해를 예고한 것이라면, 그 박해의 시작을 알리면서 한국 순교사의 첫 주추를 놓은 사람들은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었다.
본래 이들은 내외종간으로, 윤 바오로의 모친이 권 야고보의 고모였으며, 7살이 많은 야고보가 바오로의 이종사촌 형이었다. 그 중에서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윤 바오로는 전라도 진산의 장구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6대조는 조선시대 국문학과 예론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윤선도였다. 그리고 장구동 이웃에서 태어난 권 야고보는 윤선도와 함께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권시의 5대손이었다.
이처럼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들은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중에서 바오로는 1783년 봄에 고종사촌인 정약용(요한) 형제들과 함께 진사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를 다른 길로 인도하였으니,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을 오가다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됨으로써 그 세속 행로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익히 정약용 형제들로부터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대해 들어 알고 있던 바오로는 1784년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거주하고 있던 김범우(토마스)에게서 비로소「천주실의」,「칠극」등을 빌려다 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 책들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가르침을 환연히 깨달은 뒤, 이를 이종 사촌 형인 야고보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787년에는 세례를 받고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믿을 만한 전승기록에 의하면,『바오로는 수계생활에 전념하여 개인적인 성화에 힘썼으며, 그의 모친께서도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조금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야고보와 함께 교리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친지들에게 이를 정성으로 전해주었다.
이 무렵,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를 통해 조상 제사와 같은 미신행위를 일체 하지 말라는 사목 서한을 조선 신자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주교의 명령은 많은 신자들에게 신앙의 걸림돌이 되어 교회를 멀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야고보와 바오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드리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며, 1791년 모친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곧 외교인이던 친척과 주민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진산 관아와 전주 감영, 더 나아가 조정에서까지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의 양반 가문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던 그들의 행동은 다시 한 번 박해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박해자들은 사회 윤리를 어지럽히는 야고보와 바오로를 처벌하도록 종용하였고, 마침내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체포 소식을 듣고는 일단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의 삼촌이 대신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으며,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놀랄 만한 학식과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오히려 감사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설명하였다. 오히려 십계의 내용과 제사의 허망함을 설명하는 그들의 논리가 박해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윤리강상죄를 적용하여 그들의 목을 치고 5일간 효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와 야고보는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현 전동성당 앞)에서 칼날 순교하게 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첫 번째로 천주 대전에 혈세를 바친 적색 순교자들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이들의 순교 행적을 전해 듣고는 그 무덤 위에 성당이 들어서게 되리라 언명하였다. 그리고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1989년 4월 6일, 전주교구에서는 이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하여 시복시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후손들이 순교자들을 위해 할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 그들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추정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은 과연 고향인 장구봉 아래에 묻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