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쉘을 떠나 렌느를 거치면서 지난 며칠 동안의 스산한 북해의 날씨 탓인지 내 마음 속에는 따뜻한 남쪽나라 스페인이 그려지고 알 듯 말 듯한 어떤 그리움도 생겨났다. 낭트를 거쳐 보르도까지 내려가는 여로에서 남국으로 길 잡아가는 방법을 몇 가지 짚어보았는데, 결국 길은 두 갈래 길, 피레네 산맥을 우회하는 서쪽길과 동쪽길을 택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는데 서쪽 루트는 비스케만의 휴양 도시 비아리츠에서 국경을 넘어 산세바스찬과 부르고스로 진입하는 것이고 동쪽 루트를 택하면 뚤루즈와 까르까손느를 보고 바르셀로나로 가게 되는 길이다.
그러나 이 바로 넘지 못하는 피레네의 험한 준령 북쪽 기슭에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평생 한 번은 순례하고픈 로사리오 기도의 고향 마을이 있는 것을 안다. 루르드, 루르드의 성모! 성예술의 순례라 하지만 어찌 성모님께 인사 드리지 않고 이곳을 지나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무수히 보아온 노트르담(우리의 성모) 성당의 주인공이신 천상의 모후께서 친히 발현하신 루르드 동굴을 순례하리라 작정한 것은 보르도에 거의 다 와서였다.
메도크, 생떼밀리옹, 마르고, 무똥 로트쉴드 그 이름만 들어도 향기에 취하고 마는 보르도 와인의 산지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못내 아쉽지만 뚤루즈까지 가서 1박 해야 하는 순례의 길은 아직 멀고 해는 뉘엿뉘엿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맛을 음미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완벽한 세르냉 성당
다음날 아침 뚤루즈름 떠나기 전에 생 세르냉(Basi-lique St. Sernin) 성당을 찾았다. 세르냉 성당(1080~1096)은 뚤루즈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성 세르냉께 봉헌된 성당으로 프랑스에 있는 성당 중에 가장 크고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이다. 이 건물은 13세기 이래로 큰 첨삭이 가해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된 건물로서 아름다운 외관을 구성하고 있는 붉은 벽돌과 석회암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 솟아있는 5개 층으로 쌓아올려진 8면체의 종탑 모습이 다소 이색적으로 보이는 것은 본 건물이 세워지고 나서 1백 년쯤 뒤에 고딕 양식(고오트식)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이 변환될 무렵 종탑이 세워졌기 때문이다(이 지역은 옛 서고오트의 수도였다). 제단 하부에는 2층의 지하성당(Crypt)이 있는데 이곳에 생 쟈끄의 유물과 귀중한 중세시대의 필사본 등을 볼 수 있다. 프랑스말 쟈끄는 영어로는 제임스이고 라틴어는 야곱, 스페인어로는 이아고이다.
우리말로는 야고보이던가?
뚤루즈는 중세시대에 유럽의 최대 순례지 이베리아 반도의 최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 여정상의 중요한 숙박지였는데 공교롭게도 20세기에서도 가톨릭 최대의 순례지 루르드를 가는 길목에 위치하게 되었다. 어린 왕자와 야간비행을 쓴 생 땍쥐베리가 바로 이곳 뚤루즈에서 북아프리카로 날아가는 우편 비행을 한 탓인지 오늘날 뚤루즈는 콩코드 에어버스 등 프랑스 항공산업의 중심지가 되어있다.
뚤루즈를 떠나며 갑자기 한 사람의 불행한 화가가 생각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알비에서 태어난 19세기 말 야수파와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가 포스터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뚤루즈 로트렉의 이름 역시 그가 이곳을 오랫동안 지배한 뚤루즈 백작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승마 도중 말에서 떨어져 평생을 불구로 지냈으나 그의 손으로 파리의 뒷골목과 그려서는 안 될 환락가와 매춘부 댄서들의 애환이 담긴 장면들이 그려졌다. 하반신이 작은 그는 앉은뱅이와 같은 키를 가지고 낮은 데로 임하여 소외된 이들의 면면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루르드의 초입인 따르브(Tarbes)에서 남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한여름에도 만년설을 이고 있는 웅장한 피레네를 만난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바위의 산맥을 보는 순간 그간의 세상사는 멀리 사라지고 만년설이 녹아 넘쳐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피레네 만년설 웅장
루르드는 성모 발현 전에는 양치기나 농부들이 사는 인구 1천6백 명에 불과한 작은 산간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858년 2월 11일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바르뜨레 마을의 벨라뎃따 스빌이라는 양치는 소녀가 포강 건너 마사비엘 동굴 근처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흰 옷 입은 아름다운 부인을 만난다.『당신은 뉘신지요』하고 묻는 벨라뎃따에게 하늘색 띠를 허리에 늘어뜨린 부인은 피레네 사투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원죄없이 태어난 사람이다(Que Soy Era. Immaculatds Counece-Pcion)』
그보다 4년 전인 1854년 교황청에서 공시한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정의를 알리없는 산골마을 소녀는 바로 윗마을 신부님께 고하였고 교회는 이 일을 두고 몇 번에 걸친 조사를 행하였다. 아름다운 부인은 그해 7월 16일까지 무려 열여덟 번이나 벨라뎃따에게 발현하였다.
◆세계 최대의 순례지
1858년 2월 25일 9번째 발현시 부인은 마사비엘 동굴 밑을 파서 샘을 얻으라고 말하였고 11번째 발현 때는『이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사제에게 전하여라. 이곳에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게 되리라』고 예언하셨다.
루르드는 현재 전 세계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는데 연간 순례객 수는 3백만 명을 넘어 예루살렘이나 로나는 물론이고 모슬렘의 메카보다도 많은 순례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호텔을 파리를 제외하고는 프랑스 어느 지역보다도 많아 4백여 개를 헤아리고 있다.
순례철이 되면 루르드 마을은 지극히 상업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일례로 성녀 벨라뎃따가 태어난 방앗간조차도 벨라뎃따 성녀가 잠자던 침실을 나오면 바로 선물가게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포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루르드의 성역에 들어가게 되면 분위기는 일순 바뀌게 된다. 피레네 산록의 눈 녹은 물이 마사비엘을 휘감듯 넘실거리는 강둑을 내려가면 이곳 전체가 세례를 받고 있는듯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일게 된다.
루르드의 성모성당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건축되어졌는데 맨 아랫부분은 지하성당인 크립트로서 1968년 5월 성모발현 후 8년 뒤에 완공된 것이다. 그 위에 있는 로사리오 대성당은 성모발현 후 30년이 지난 19세기 말에 완공된 네오로마네스크와 네오비잔틴이라는 다소 어색하고 조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당 내부는 그리스식 십자형(Greek cross)의 평면으로써 중앙의 반구형 천정에는 많은 천사들로 에워쌓인 성모 마리아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그 밑에『성모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라고 라틴어가 쓰여져 있다. 로사리오 성당의 2층 부분은 무염시태의 성당이라고도 불리운다. 대리석 판에 이 성지에서 치유의 은사를 입은 이들이『성모 마리아께 감사』라는 글귀와 함께 연대기를 기록한 것이 양쪽 벽을 가득 메운 것이 매우 감동적이다.
◆통일성 진지함 결여
밖으로 나와보면 루르드의 성모 성당은 안정감은 있으되 통일성과 건축양식의 진지함이 결여된 옛 양식의 모방뿐인 건물이다. 그러나 루르드에서 매일 오후 4시 30분이면 열리는 성체 거동에 참석해 본 사람이면, 내일 저녁 8시 30분에 시작되는 그 장엄하고 신비로운 촛불행렬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신앙 속의 일치는 예술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이 성지는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가슴을 하루 종일 울렁거리게 하고 저절로 흐르는 눈물조차 말릴 수 없게 만든다. 연간 40만 명이 입욕하는 욕장에서 일어난 가장 최근의 기적은 1976년의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팡이와 휠체어를 버리고 떠난 이 성지에서 기적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루르드 마을의 세속화와 반비례하는 현상일까? 다시 건축가의 발길은 축구장 윗편에 자리 잡은 1959년에 건립된 비오 10세 지하성당으로 향한다. 길이 200m 폭 80m, 수용 인원 2만여 명을 헤아리는 거대한 구조물이 잔디와 꽃들로 뒤덮여 있다.
아무리 예술성이 없는 옛 건물일지라도 이를 살리기 위하여 자기의 것을 숨기는, 역사를 더 존중하고 환경을 지켜려는 이 건축가의 이름을 알고 싶다.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이 받을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루르드를 떠난다. 어쩐지 도시 한 가운데 연로하신 어머님을 홀로 두고 떠나는 것 처럼 마음이 허전하다. 10여 년 전 맨 처음 순례 철이 끝난 12월의 루르드에 와서 겨울비 속의 새벽기도 때 내내 흘리던 눈물 어린 장면이 다시 떠오르자 나는 급히 차를 몰아 루르드 시내를 빠져 산세바스찬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