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진석 추기경 선종] 삶과 신앙 Ⅰ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1-04-28 수정일 2021-04-28 발행일 2021-05-03 제 3243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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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보다 교회에 먼저 올린 이름… 결국 목자의 길을 걷다
독실한 외조부 영향 받아
매일 가족과 함께 ‘만과’ 바치며
어릴 때부터 충실한 신앙생활
전쟁 겪은 뒤 사제의 길 다짐

정진석 추기경이 1998년 6월 29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및 감사미사 후 퇴장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 두 번째 추기경이자 청주교구장과 서울대교구장으로, 교회법 학자와 교회 서적 집필자 등으로 60년 사제 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정진석 추기경. 정 추기경이 쉼 없이 걸었던 사제의 길은 곧 신앙의 길이다. 정 추기경이 이 땅에 남긴 ‘신앙인 정진석’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가정생활이 곧 신앙교육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성직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정진석 추기경도 1931년 12월 2일 서울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에서의 양육이 곧 신앙교육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 추기경은 태어난 지 4일 만인 12월 6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니콜라오’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정 추기경의 유아세례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호적상으로는 태어나기도 전에 유아세례를 먼저 받은 것이다. 정 추기경의 호적상 출생일은 1931년 12월 7일로 기록돼 있어 ‘공적인 출생’보다 하루 빨리 유아세례를 받았다. 지금 생각으로는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과거 가톨릭 집안에서는 유아세례를 통해 교회에 먼저 이름을 올리고 그 후에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정 추기경의 어린 시절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외할아버지였다. 장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던 외할아버지는 서울 명동본당 회장을 지낼 만큼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정 추기경은 출생 후 줄곧 수표교 근처 외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며 신앙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기도가 일상인 삶이었다. 어린 시절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듣던 어머니 이복순(루치아)씨의 말이 “진석아, 만과(晩課) 바칠 시간이다!”였다. 지금은 ‘만과’라는 용어가 생소하지만 오래 전 저녁에 가족들이 십자고상과 성모상 앞에서 드리는 만과는 어린 아이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에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정 추기경은 추기경 시절에도 어릴 때 만과를 바치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 가족 모두가 저녁마다 바치는 기도이니 싫다 좋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도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됐고 정 추기경의 삶에도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음에 감사했다. 한번 세워진 신앙의 기초가 일생토록 지탱됐다.

정 추기경은 9살 때인 1939년 7월 23일 명동대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했다. 이후에도 신앙적 분위기에 둘러싸여 살았지만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처음부터 꾸었던 것은 아니다. 소년 시절 정 추기경은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새로운 발명품으로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보았던 발명가들의 위인전은 정 추기경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를 심어줬다.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노기남 주교(가운데) 서품식에서 소년 정진석 추기경(왼쪽 맨 앞)이 노기남 주교, 복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사제품을 받은 정진석 추기경(왼쪽 다섯 번째)이 1961년 3월 19일 첫 미사 후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 추기경 오른쪽이 어머니 이복순(루치아) 여사. 서울대교구 제공

■ 전쟁 체험이 삶의 방향 바꿔

그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 재학 중에 터진 한국전쟁은 정 추기경 삶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과학의 발명품들이 사람에게 선익을 주지 않고 살상 무기로 이용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전의 꿈에 회의감이 들었다. 사제의 길을 생각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외아들이었던 정 추기경이 신학교에 가려면 그 시절에는 주교의 허락이 필요했다. 집안의 반대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정 추기경이 “어머니, 제가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음에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이미 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가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노 대주교는 처음에 반대했다. 외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면 부모는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머니의 고집 앞에 노 대주교는 결국 신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정 추기경은 훗날 주교가 돼서 사제서품식을 주례할 때면 새 사제들의 부모님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의 신학교 입학 허락을 받아 냈던 어머니의 굳은 믿음을 되새기곤 했다. 정 추기경은 2006년 추기경 서임 발표 직후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무엇을 해 드리고 싶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1996년 6월 6일 편안하게 잠을 청하듯 선종한 어머니를 떠올리고는 “절을 하고 싶어요. 끝없이 많이….”라고 답하며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냈다.

정 추기경이 사제가 되는 데는 한국전쟁 체험이 하나의 계기가 됐지만 그에 앞서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한국인 최초의 주교인 노기남 주교 서품 미사 참례도 정 추기경에게 사제가 되는 실마리가 됐다. 정 추기경은 노 주교 서품식에서 복사로 뽑혀 난생 처음 주교 서품식을 볼 수 있었고 자신이 미사를 주례하는 상상을 했다고 회상했다.

정 추기경이 한국전쟁 후 어렵사리 입학 허락을 받아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1954년 봄이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던 정 추기경은 자신이 번역하고도 책이 나올 때는 신학생 이름을 책에 올리는 것은 성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번역자로 표기되는 일을 겪곤 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은 정 추기경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은퇴 후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생활하던 시절에도 교회법 서적을 포함해 매해 책을 내는 것을 자신과의 약속이라며 끝까지 지켰다.

2011년 3월 27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사제품 금경축 행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사제단 대표로부터 선물을 받고 있다.

■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삶으로

주교가 된 정 추기경은 1970년 10월 3일 청주 내덕동성당에서 청주교구장에 착좌했다. 청주교구 첫 한국인 교구장이라는 역사가 새겨졌다. 그러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청주교구 사제들은 절대다수가 미국인이었고 서품 연차도 정 추기경보다 대부분 높았다. 또한 당시에는 사제들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교구 형편이 어려웠다.

1998년 정 추기경이 28년간의 청주교구장 사목을 마치고 서울대교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 청주교구민들은 “주교님, 청주교구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눈물겹게 말했다. 사실 정 추기경은 28년 전 청주교구장으로 부임할 때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 여겼고 서울대교구장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청주교구장 재임 시절 하느님께 ‘교구 사제 100명을 달라’고 기도했던 일이 106명으로 성취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서울로 떠난 것은 큰 감사와 보람이었다. 1998년 6월 29일 정 추기경은 명동대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다. 후임 염수정 추기경에게 교구장 자리를 물려주고 2012년 5월 10일 교구장에서 퇴임하기까지 14년간 서울대교구를 이끌었다.

이제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은 오늘을 사는 신자들의 몫이다.

2005년 12월 4일 서울대교구 생명의 날 행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평화방송 소년소녀합창단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