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 고하 막론하고 천주교 전파에 앞장서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 비롯 서양 학문·천주교 교리에 감명 남경에서 구태소의 제안으로 마테오 리치 직접 만나기도 세례 받은 뒤 전교에 큰 역할 「기인십편」 「영언여작」 등 여러 교리서와 호교서도 저술 조선에 천주교 전파 시도 ‘눈길’ 상해교구에서 시복 추진 중
■ 서광계식 개교(開敎) 방식으로 조선 천주교 개교?
서광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주교를 전교했다. 1606년 북경에서 73세의 부친과 부인 오씨 그리고 장남이 세례를 받았다. 1607년에 그는 상해에서 부친상을 치르면서 남경에 있던 카타네오 신부를 상해로 초청해 상해현과 포동을 개교시켰고, 이때 세례받은 사람이 200여 명이나 됐다. 부친 상중에도 서광계는 정3품 포정사인 허락선을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1577~1628) 신부에게 인도해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게 했으며, 자신의 둘째 손녀인 서 칸디다(Candida)를 허락선의 손자인 허원도와 혼인을 맺어 줬다. 당시 서광계는 자손의 혼인 관계, 친구, 지인,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고향에 천주교를 개교하는 ‘서광계식 개교’로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서광계와 함께 중국천주교의 3대 주춧돌로 불리는 이지조와 양정균(이 둘은 절강성 항주 개교)의 세례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이외에도 서광계가 천주교로 인도한 인물로는 제자인 손원화(강소성 가정 개교)와 한림·한운 형제(산서성 강주 개교)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을 천주교로 개교시키고자 한 서광계의 노력은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다. 남경교난을 이유로 1619년 관직에 나가지 않았을 때와 복직됐던 1621년, 서광계는 만주족의 요동 침략에 대한 타개책으로 조선에 청병(請兵)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청병을 이유로 조선을 방문해 자신의 방식으로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일은 허락되지 않아 조선 개교는 실현될 수 없었다.신의식(멜키올)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장·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