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71) 마음의 거리 (하)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2-02 수정일 2021-02-02 발행일 2021-02-07 제 3231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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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새해 첫날,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 나를 만나려고 개갑장터성지 순례를 오신 자매님.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이고 자녀도 다 키워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황량한 겨울 들판에 전날 눈까지 내려 차가운 눈바람이 불어대는 성지를 – 저녁 한 끼 같이 먹자고 마치 옆집 오듯 찾아오신 자매님!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라 반가운 마음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자매님, 이게 뭔 일이래요? 새해 첫날부터 이 먼 곳까지 성지순례를 오시고. 아차, 여기서 광주가 가까운데 남편께 전화해서 여기로 오라고 해 보시겠어요? 저녁식사 같이 할 수 있도록.”

“아니에요. 남편은 내일까지 볼일이 있고 저는 순례를 다 했기에, 신부님과 저녁식사만 하고 고창으로 다시 갔다가 내일 서울로 올라 갈 거예요.”

“이 칼바람을 맞으며 순례를 하셨어요?”

“예. 십자가의 길도 바치고 묵상도 했어요. 눈, 바람, 자연 환경, 그리고 복자 최여겸 마티아의 순교영성을 떠올리며 순례를 했어요. 많은 것을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렇구나. 암튼 사무실에 잠깐 들어가요.”

우리는 성지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차를 드리자 자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제가 일 년 중에 가장 한가하고 자유로운 시간이 바로 지금이에요. 3일까지 연휴라 지금 이렇게 쉬는 거예요. 그리고 서울로 가면 며칠 안에 인사이동이 있어서 또 다시 다른 과에서 다른 업무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자매님, 서울서 여기까지가 멀지 않았어요?” “신부님. 먼 외국까지 가서 순례하는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말을 쓰는 나라에서 뭐가 멀다고 그래요. 마음이 멀면 먼 것이지 세상에 먼 곳이 어디 있어요!”

“그런가! 그런데 작년까지는 무슨 과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순간, 조용한 정적과 함께 자매님 눈에선 참고 참았던 것으로 느껴지는 눈물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그렇게 잠시 울다가 휴지로 눈물을 닦더니,

“지난 일 년 동안 변사 사건을 많이 맡았어요. 자살한 분, 다리에서 투신해 익사한 분. 또 고독사한 분과 무연고자들…. 일 년 내내 가슴 아픈 사연들만 다루다 보니 마음이 참 무거웠어요. 신부님,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를 안고 죽어가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그분들 한 분 한 분에 대한 서류들을 정리하는데…. 사무실에서는 일이라 생각해서 한 사람의 죽음을 ‘사건’으로 처리하지만, 그 사건이 정리가 되면 그분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요. 그러다보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죠. 변사자들 한 분 한 분의 사건을 다룰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류 정리는 하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다리에서 뛰어 내리거나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누군가는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냉방에서 쓸쓸히 마지막을 맞이하고…. 그 모습을 생각하면…!” 자매님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다, 다시금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까지 오는 것이 멀지 않던데요. 하하하. 어제 밤에는 여기 올 생각을 하며 대중교통을 알아보는데, 어린 시절 소풍가기 전날 설레던 마음이 떠오르더군요.”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까우면 북극 ‘알래스카’도 옆집이고, 마음이 멀면 옆집도 ‘달나라’겠지요. 그리고 쓸쓸히 죽어간 분들 역시 누군가와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다보니, 그렇게 혼자서 그 머나먼 길을 갔겠다 싶었습니다. 올 한 해 나를 돌아볼 묵상거리가 생겼습니다. 지금, 이 세상과 이웃과 내 마음의 거리는 얼마인가. 깊이 성찰하며 살 결심을 해 봅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