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58) 어르신과 본당 신부의 신경전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0-11-03 수정일 2020-11-03 발행일 2020-11-08 제 3218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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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초입 은인으로부터 ‘보랏빛 키 작은 난장이 국화’를 기증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몽우리가 맺힌 정도였는데 어느덧 국화꽃으로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나는 기증 받은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8시 30분 즈음이면, 국화에 물을 주었습니다. 물 줄 때마다 느껴지는 국화의 은은한 향기 덕분에, 내 하루의 삶이 국화 향기로 물들어 가는 듯 했습니다.

그 날도 국화꽃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미사에 참례하시는 본당 어르신 한 분이 일찍 성당에 오시더니, 내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신부님, 오늘은 제가 국화꽃에 물을 줄게요. 어서 미사 준비하셔요.”

나는 어르신의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미사 시간이 1시간 30분 남았고, 물주는 건 20분이면 다 되는데!’ 그래서 어르신께 말했습니다.

“어르신, 제가 물을 빨리 주고 미사 들어갈게요.”

그런데 그 어르신은 계속해서 물을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미소 짓는 척 하며, ‘괜찮습니다’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르신은 마당에 있는 의자에 잠시 앉아 계시다가 다시 수도꼭지가 있는 쪽으로 가시더니 중대한 사명감을 띤 표정으로 호스를 천천히 감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속으로 ‘아이고, 좀 가만히 계시면 좋겠는데, 왜 저러시나!’ 그러면서 못 본척하며 계속해서 꽃에 물을 주었습니다.

사실 호스로 물을 주다보면, 바닥의 흙먼지와 물기가 호스 줄과 뒤엉켜 호스 줄이 무척 지저분해진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왕에 버린 손으로 호스를 잘 정리하면 될 터인데, 어르신은 내가 물주는 일을 끝내고 있음을 아시곤 긴 호스를 원위치하려고 감고 계시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실, 불편한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어르신을 향해 약간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르신, 이제 물을 다 주었어요. 그러니 호수도 제가 감고 주변 정리를 다 할게요. 어르신 진심 감사드리고요, 이제는 좀 쉬셔요.”

그러다 시간은 거의 8시 50분이 되었습니다. 이에 어르신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신부님 오늘은 사무실 직원이 출근 안 해요?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나온 것 같아서요.”

“어르신, 사무실 직원 출근해요. 그런데 시간이 아직 좀 남았어요.”

“어, 직원이 출근했다고요? 그러면 신부님, 어제까지는 9시가 되어 성당문을 열었는데, 오늘은 지금 10시가 다 되었는데도 문이 안 열려 있어요.”

“어르신, 직원들은 8시 50분 즈음 출근해서, 9시에 성당 문을 열잖아요.”

“아니, 지금 10시가 다 되었는데?”

“어르신, 지금 시계 좀 보셔요. 8시 50분이예요.”

그제야 어르신은 당신이 한 시간 먼저 성당에 일찍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어르신은 쑥스러운 듯 발그레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 참, 신부님, 죄송해요. 제가 집에 갔다가 다시 시간되면 성당 올게요.”

어르신과의 신경전에서 내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간을 착각하신 어르신. 미사 시간 직전인데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애간장이 탔던 어르신. 마음속으로 ‘신부님이 지금 미사 준비하셔야 하는데!’하며 내 주변을 맴돌던 어르신. 그 거룩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신경전에서 ‘승’을 하신 분은 어르신이었습니다. 본당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본당 신부의 생활. 서로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신경전을 겪으면서 이런 신경전은 하느님 보시기에도 흐뭇한 모습이라는 묵상을 해 봅시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