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하)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0-10-27 수정일 2020-10-28 발행일 2020-11-01 제 321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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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정신 실천하며 선교 지평 확장
본당·의료·교육·사회복지 등 다양한 분야서 사도직 수행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회원들이 남북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성체 현시 시간을 갖고 있다.

설립자 부재중에도 새 수도회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1940년 6월 27일 마침내 11명 수녀가 첫 서원을 하고 본당과 학교에 파견됐다. 이후 서원한 수녀들은 설립 목적대로 각 본당에 파견돼 소속 유치원, 양로원, 병원 등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성장은 순탄치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일본은 미국계 선교사들을 1942년 본국으로 추방했다. 평양에서는 이미 1941년 12월부터 선교사들이 자택연금 혹은 집단으로 감금된 상황이었다.

제4대 평양교구장 윌리엄 오세아(William O’Shea) 주교는 교구청 연금 상태에서 메리놀 수녀회 소속 장정온 수녀를 수도회 원장으로 임명했다. 한국인이어서 일본 정부의 추방 정책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 수녀의 임무는 지도자를 잃어 해산될지도 모르는 수도회 기초를 다져 수도자들이 자립하는 것이었다. 해방이 됐지만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은 계속됐다. 그러나 회원들은 장 수녀를 중심으로 수도 생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수녀들의 영적 생활을 위한 교육과 라틴어, 성경, 성 아우구스티노 규칙 등을 교육했고 1947년부터는 전교 활동에 도움이 되고 파견 회원들이 본원과 소통할 수 있는 수도회 회지를 월 2회 발간했다. 이때 발행된 회지 「Sursum Corda」는 1971년 10월 「영원한 도움」으로 개칭돼 현재까지 월 1회 발간되고 있다.

수도원 건물과 재산이 몰수되고 수녀들도 해산되는 등 공산당 치하에서 어려움을 겪던 수도회는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10월 장정온 수녀와 본가에 갔던 서 요셉 수녀가 피랍되는 시련을 맞았다.

유엔군의 갑작스런 후퇴로 남하한 수도자들은 부산에서 전쟁고아들과 미망인들을 돌보는 등 어려운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수련소 운영을 재개했고 1955년 서울 흑석동으로 본원을 이전했다. 1966년 11월 본원이 현재 위치인 서울 정릉에 자리 잡게 되면서 국내외 본당, 의료, 사회복지, 교육 사도직 활동 등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가톨릭 성서 모임’을 시작해 청년들을 비롯한 성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는 길을 열었다.

1969년 ‘재단법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이름으로 법인 인가를 받아 재정적 자립을 이룩한 수도회는 한국교회 확장과 더불어 성장을 가속했고 설립자 연구와 함께 1980년 후반부터 수도회 카리스마와 영성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1년 12월 8일 자로 교구 소속 수도회에서 교황청 소속 수도회로 전환했다.

이로써 수도회는 보편 교회와 연대하며 본당 사도직, 북한과 북방 선교 준비를 위한 평화 사도직, 사회복지, 성서사도직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설립의 참뜻을 널리 펼치며’ 선교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