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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공역의 어려움과 문제점/백민관 신부

백민관 신부ㆍ가톨릭성서위원회 총무ㆍ가톨릭대 신학부 교수
입력일 2020-01-21 수정일 2020-01-21 발행일 1977-05-08 제 1056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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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완역』기대는 금물”
「외경」보다「제2경전」더 타당

개신교의「하나님」고집은 사리에 맞지 않아
집회서에서도 번역의 어려움 지적

1984년이면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2백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독본인 성서를 번역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가톨릭보다도 약 1세기나 늦게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1886년 성서 번역으로 그 첫 발을 내딛었다. 천주교는 1910년에 이르러서 겨우 4복음서가 번역되었고 41년에 서간편이 번역되었으나 구약성경은 번역할 꿈조차 못 꾸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선종완 신부님이 구약 번역의 꿈을 안고 창세기를 59년에 내기 시작하였지만 교계에서 번역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또 교회 당국이 지원을 하지 않아 중도에서 주춤하고 말았었다. 이제 늦게나마 공동 번역이 나온 것은 번역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 기쁨은 말할 수가 없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듯이 번역 치고 잘된 번역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몇 천 년 전에 전연 다른 문화군에서 씌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옮긴다는 것은 스스로 반역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집회서의 말에서도 지적되고 있다.『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절의 번역이 혹 잘못 되었으면 널리 양해해주기를 바란다. 원래 히브리어로 표현된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놓으면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수가 많다』그러니 이 공동 번역도 잘된 번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역사와 조직과 생활 감정이 상이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 작업은 번역 과정에서 공동 번역이라는 제약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양측 교회에서 혹시 자기네의 전통적인 표현과 다른 용어나 해석이 공동 번역에서 발견되었다 해서 이것을 반성서적 반교리적이니 졸작이니 하는 것은 아집에서 오는 궤변이다. 공동번역위원회는 번역 시초에 이런 불편과 난관을 해소키 위해 용어 번역상의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우선「바티깐」일치국과 세계성서공회 연합회 측과의 합의 문서이다. 그 문서는 양측의 다른 용어를 가능한 통일하자는 것이고 한 책 속에 서로 다른 표기를 부가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의 출판권은 공동 번역에 한해서는 성서공회에서 가지고 가톨릭 측과 분할 점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합의 문서를 토대로 한국에서는 세칙을 마련했다. 용어 표기에서 첫째 번역 이전에 이미 양측이 같이 쓴 용어는 그것으로 확정한다. 둘째 서로 다를 때에는 그것이 고유명사이면 원어 발음을 따르고 일반 용어인 경우 우리말 표준어를 따른다. 셋째 양쪽 위원들이 합의하면 그것을 공동 용어로 쓴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주를 달아 상이점을 표시한다로 되어 있다. 위의 원칙하에 대부분은 다 해결되었지만 구약에서의 소위「외경」이란 말만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기 다른 용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뒤에 논하기로 하고 합의를 본 것 중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공동 번역 신약성서가 나온 후 개신교 측에서 일으킨 것으로「하느님」이란 용어 문제이다.

그들은 하느님은 하늘이란 자연물의 주인님이란 뜻이기 때문에 자연신교 내지는 다신교적인 뜻이 있어서 단연 배척해야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이신 님을 표시하는 유일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개념을 그대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특성이 무수히 많다. 하나이시고 거룩하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등등. 그 중 어느 하나도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은 얼핏 잘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 나타난 제1차적인 하느님 개념은 창조주이다. 구약성경도 신약성경도 첫 마디는 창조주로서 시작한다. 둘째 우리말 어법에 숫자 즉 하나 둘 셋에다가 님짜를 불일 수는 없다. 그리고「하나이신 님」은 우리의 언어에서는 신개념을 주지 않는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우리의 민속신앙에서 하늘의 주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의「하느님」은 라틴어의 데우스보다 그리이스어의 제우스보다도 영어의 갇이나 독일어의 곧트보다도 그리스도교적이다. 그들의 신을 표현하는 용어는 본래 다른 잡신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신화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의 기원이 되는 하늘은 우리조상들이 그 말에「하나」라는 뜻의「한」을 담았고 크다는 뜻으로「한」을 담았다. 기가 막힌 용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의 공통성을 찾기 위해서는 전통에서 벗어나 이치로 돌아오는 아량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신구약 합본이 보급되지 않았는데 말썽이 생긴 모양이다. 그것은 다름아닌「외경」문제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용어 문제만이 통일을 보지못한 문제이다. 그 내용상 합의를 볼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니 개신교측 용어와 가톨릭 용어를 따로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성서에는 가톨릭 내용에 외경(제2정경)이라 한 것이다. 가톨릭용에 왜 외경이란 말이 들어갔느냐는 여론이 있지만 이것은 두 개의 성서는 내지 말라는 합의 문서의 지침을 따른 것이고 바로 그 합의 문서에도 이 두 개의 용어가 겹쳐서 씌여져 있다. 이 문제는 일반 신자들의 이해를 위해 자세하고 긴 말이 필요하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경의 권수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다.

가톨릭에서는 신구약의 권수를 세는데 신약이 27권, 신구약 모두 합쳐서 27의 거꾸로 수 72에 하나를 더하여 73권이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신약 27권은 우리와 같지만 구약에서 7권이 빠진다. 이제 이 차이가 되는 7권의 명칭이 문제가 된다.

이 7권은 가톨릭에서는「데우뜨로까노니치」라고 하여「아포크리과」또는「프세두도까노니치」와 엄격히 구별한다. 후자는 따라서 가톨릭 공식 명칭대로는 가짜 성경 즉 위경(僞經)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런데 프로데스탄트에서는 위에 말한 7권까지도 성서가 아니라고 하여 이것을 다른 위경과 합쳐서 아포크리파라 하고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외경이라고 번역한다. 이제 문제는 번역상의 문제인데 프로테스탄트에서 아포그리파를 위경이라 하지 않고 외경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외경이란 말로서 위경이란 말은 섣부른 번역이다. 외경은 우리나라 어법상 내경과 대조되는 말이다.

경전 외의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려면「경외경」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외경이면「바깥」의 뜻이 된다. 이제 가톨릭에서 문제의 7권을 데우뜨로까노니치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서 그대로 도입하여 제2정경이라고 흔히들 부른다. 이 번역은 말을 원어대로 번역한 것이지 잘된 번역은 역시 아니다. 경전에 정경이면 정경이지 제2정경이란 있을 수 없다. 정경의 상대되는 말은 부경이다. 그런데 데두뜨로(제2회) 까노니치(정경)가 그 경전의 성격이 지차적이라서 데두뜨로까노니치가 아니고 그것이 성서로 공인된 것이 후대라는 뜻에서 데우뜨로라는 머리를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당 되는 말은 쁘르도까노니치(제1정경)이다. 처음부터 성서로 공인된 책이란 뜻이다.

그러나 제1과 제2는 모두 똑같은 비중을 지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에서 석차 개념이 있는 제1ㆍ제2의 머리를 붙이는 것은 서투른 번역이다. 그러면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으냐? 좋은 대안이 없다. 굳이 원어 번역을 하자면「제2정경」이 아니고「제2경전」이라 해야 될 것이다. 이상으로 본다면 이번 성경에 가톨릭용이라 하고 그 속에「외경」이란 말을 용납했다 해서 파문감이라는 폭언은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주=본보 5월 1일자 3면「이대로 좋은가?」기사에서 말씀해주신 분 중 최창무 박상래 서인석 신부의 경우는「관계 인사」가아니고「관심을 가진 분」이며 「공식적인 의견 발표]가 아니고「사담(私談)을 통한 견해 표명」이기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백민관 신부ㆍ가톨릭성서위원회 총무ㆍ가톨릭대 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