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함께 계시다

김혜윤 수녀rn(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입력일 2019-12-17 수정일 2019-12-17 발행일 2019-12-25 제 317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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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제1독서(이사 7,10-14) 제2독서(로마 1,1-7) 복음(마태 1,18-24)

누군가의 모습을 관찰하고 감상하며 그저 마음의 우상처럼 여기고 살고 싶다면 먼 거리가 필요하겠지만, 삶의 매 순간을 함께 하며 진정성 있는 도전과 기쁨으로 일상을 채우고 싶다면 가까이 다가가려는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제 대림(待臨)의 절정에 도달한 교회는 멀리 계시던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성큼 가까이 다가오심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대림 4주일의 성경 본문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는지 그 민감하고도 신비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지극히 높이, 그렇게 멀리에 계시던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시고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다는 내용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를 소개하고 있는데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가문과 족보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서두에 두고(1,1-17) 이어서 바로 오늘의 본문을 배치합니다.(1,18-24)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장엄히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던 요셉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법적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원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수태고지’.

■ 다윗의 후손이신 분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마태 1,19) 율법에 성실한 이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신명 22,23-27) 한 남성과 약혼한 여성이 부적절한 관계로 임신하였을 때 이를 불륜으로 간주하고 해당 여성과 남성에게 투석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혼을 허락하고 있었기에(신명 23,13-21; 미쉬나 소타 1.1,5) 요셉은 고뇌 끝에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하기로 결심합니다. 공개적으로 처리하여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20절)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두려워하다’는 ‘포베오마이’로서 ‘두려워하다, 겁을 먹다, 섬뜩해서 놀라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셉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공포를 느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를 ‘꿈’이나 ‘초월적 중재자’를 통하여 전달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적용됩니다.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20절) 마리아의 임신이 윤리적으로 부정한 사건이 아님을 밝히고 두려워하고 있던 요셉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은 이 사건이 하느님의 주도면밀한 구원 계획 속에 이루어진 위대한 역사임을 믿게 되고 이후 자신의 사명을 과감하게 실행합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마리아에게 전달된 루카복음과는 달리 마태오복음에서는 천사의 메시지가 요셉에게 주어지는데, 이 메시지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사야에게 주어졌던 신탁의 실현임을 명시합니다. 이때 인용된 예언서 본문은 이사야서 7,14의 칠십인역이며 히브리어 본문의 ‘알마’(젊은 여성)가 그리스어 ‘파르테노스’(동정녀)로 의역되어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로는 ‘베툴라’와 ‘알마’가 있는데 ‘베툴라’는 그야말로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동정녀를 의미하고 ‘알마’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젊은 아가씨를 지칭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젊은 여인’으로 되어 있던 단어가 굳이 ‘동정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진정한 ‘인간’이셨지만 동시에 동정잉태라는 신비로운 사건을 통해 태어나신 진정한 ‘하느님’이심을 강조합니다.

■ 임마누엘이신 분

복음이 제시하는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탄생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장엄히 선언한 내용이었습니다.(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8세기는 남하(南下)하는 아시리아를 저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동맹을 맺고 남 유다 역시 여기에 동참할 것을 강요받던 시기였습니다. 남 유다의 왕 아하즈는 이 난국을 군사적 대응과 외교적 동맹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이때 예언자는 동맹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과 믿음’임을 역설합니다.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예루살렘이지만 결코 멸망당하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으라는 것인데,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은 하느님의 승리를 약속하는 이 신탁을 믿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의 허술한 신앙을 살짝 겉꾸며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12)라는 말로 하느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자기기만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부족을 교묘히 포장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려 한 것입니다. 예언자는 아하즈의 이러한 행동이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13절) 이때 ‘성가시게 하다’라는 표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라아’이며, ‘지치게 하다, 무력하게 하다’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아하즈의 겉꾸민 충성심은 충분히 하느님을 지치게 하고 난감하게 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항구한 관용과 인내로 계획하신 표징을 변함없이 내려 주십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14절) 낳을 것이라는 표징입니다.

■ 다윗의 후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

제2독서의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로마 1,1) 받아 복음을 전한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2-3절)이며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4절)라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한 ‘인간’이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증명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며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이들과, 반대로 고통과 위험, 굴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내려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열망, 그 견고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의 어둠과 악을 없애시려 홀연히 인간이 되어 우리 안에 오신 분, 이 주체적 다가옴이야말로 성탄이 주는 진정한 선물이며 우리가 고이 간직해야 할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단단히 구축하시고자 우리들 가운데 오신 성탄은 그 어떤 불행이나 위악(僞惡)도 방해하지 못할 완벽하고 일관되며 두려움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수녀rn(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