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대흥동 종소리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9-09-24 수정일 2019-09-25 발행일 2019-09-29 제 316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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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종지기의 마지막 종소리
아름다웠다… 그래서 애잔했다
대전 대흥동 도심을 감싸던 종소리
교회와 도시를 잇는 매개체로 역할
자동화 시스템에도 위로의 울림 계속

대전 주교좌대흥동본당(주임 박진홍 신부)이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50여 년간 종지기로 살아온 조정형(프란치스코·73)씨가 직접 타종해서 들려 주는 ‘대흥동 종소리’는 대전 원도심의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돼 왔다. 대흥동본당의 100년 역사와 종소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본다.

■ 마지막 종소리

9월 22일 오전, 대전 대흥동성당, 10시 교중미사 시작 전. 제대 위로 대형 스크린이 내려 왔다. 모두 숨을 죽이고 마지막 타종행사가 중계되는 스크린을 주시했다.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120개 좁은 계단 위를 오른다. 50년 넘게 종소리를 들려 준 조정형씨. 기도, 그리고 세 가닥 줄을 움켜쥐고 매달리다시피 줄을 당긴다. 큰 종 두 번, 중간 종 두 번, 작은 종 연타, 이어서 세 가닥 줄을 오가며 아름다운 울림을 만든다.

낮 12시와 오후 7시의 삼종 종소리는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을 세 번씩 울리고 다시 큰 종을 20번 울리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타종은 화려하게 아름다웠다. 박수는 그에 대한 찬탄이요, 이제 들을 수 없다는 탄식이었다.

미사가 시작됐다. 마지막 종소리의 여운이 맴도는 가운데, 새 양복을 입은 조씨가 입장했다. 청년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선물한 옷이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마중나온 박진홍 신부가 ‘방지거’(프란치스코) 할아버지를 껴안아 50년의 노고에 감사했다.

“종지기로 살아온 지난 삶 행복했습니다. 많은 배려와 기도에 감사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짧은 인사말, 눈물이 솟는지 얼굴이 찡그려진 그는 지난 50년을 행복으로 추억하고 감사와 사랑으로 마무리했다. 본당에서 마련한 예루살렘 성지순례, 그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종지기로는 은퇴하지만, 성당의 수많은 문들을 열고 닫는 소임은 계속한다.

조정형씨를 격려하고 있는 박진홍 신부.

■ 대흥동의 종소리

대흥동에서는 시민들이 종소리를 사랑한다.

“성당 종소리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이어주는 것 같아요. 그 동안 그 종소리 고마웠습니다.”(남명옥, 극단 ‘나무시어터’)

“대흥동성당 하면 종소리죠. 모두에게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노철수(토마스))

“소란스러운 소리들 속에서 땡땡땡 하는 그 종소리가 마음을 잠시라도 편안하게 해 줬던 것 같아요.”(허은선 예술인)

2017년, 주민들 대상으로 100인 설문조사를 했다. 종소리는 밥 때를 알리는 소리였고, 일상에 쉼표를 찍어주는 휴식이었다. 문화기획자 서은덕(미카엘라)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지역은 상업시설들이 밀집된 세속적인 공간입니다. 소비공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성당, 지붕들 위로 퍼져 나가는 종소리는 위안과 평화를 줍니다. 종교적인 메시지를 넘어서지요.”

종소리는 그대로 대흥동성당의 존재로 연결된다.

“진로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성당을 지나면서 성모상을 보게 됐어요. 바라만 봐도 제 존재를 알아주고 걱정을 잊게 해 주더라구요.”(김채영, ‘윈터커피’)

조정형 할아버지가 수년 전 성지순례를 갔던 열흘간 신학생이 대신 종을 쳤다. 항의가 빗발쳤다. “누가 종을 치길래 이렇게 엉터리입니까?” 누구나 함부로 칠 수 있는 종이 아니었다.

■ 대흥동과 대전 원도심

둔산동 등에 신도시가 마련된 뒤, 대흥동 주변은 도심으로서의 역할이 폐기되고 쇠락했다. 대흥동본당이 처음부터 원도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15년 지금의 목동 근처 ‘생곡’(生谷) 공소에서 시작해 1919년 대전 첫 본당 ‘대전본당’이 설립됐다. 이후 1945년 지금 자리로 옮겨 왔고, 6·25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된 뒤, 1962년 12월 지금의 성당이 건립됐다. 이때부터 대전 원도심 안에서의 대흥동본당 역사가 시작됐다.

전후 삶은 피폐했다. 원조 밀가루 등이 대전에 모였다가 다른 지방으로 갔다. 성당과 함께 원도심의 두 상징인 ‘성심당’ 빵집도 창업주 임길순·한순덕 부부가 1956년 성당에서 나눠준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성심당은 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옮겨, 코앞에 자리 잡았다.

1970·80년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처럼 대전에서는 시민들이 대흥동성당으로 숨어 들었다. 이용원 월간토마토 대표는 “성당 옆 중앙로가 대전 대학생들에게는 민주화 성지였다”며 “시위하다 선배들을 놓치면 성당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대흥동본당 100주년사는 80년대를 이렇게 요약한다. “대흥동성당을 중심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교권 수호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미사와 행사가 자주 열렸고, 사람들은 성당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주시했다.”

성당을 대전 원도심과 맺어준 것은 종소리뿐만은 아니었다.

9월 22일 오전, 대전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마지막 타종행사가 중계되는 스크린을 보고 있는 신자들.

■ 새로운 종소리,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

본당 100주년의 모토는 뮈텔 주교가 말한 “언젠가 여러분의 교회는 그 도시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였다. 100주년 기념사업단 문화기획팀 김미진(아녜스)씨는 “교회가 교회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며 “교회와 도시가 하나가 되고 교회 공간 자체를 세상을 향해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종소리가 종탑과 담장을 넘어 어머니처럼 여겨졌던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100년을 지나는 본당이 종소리를 더 또렷하게 들려 줬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유정미 교수(대전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는 대흥동성당이 대전 원도심의 랜드마크라며, “종소리와 성당의 존재를 도시와 도시인들이 자기 삶과 공간의 일부로 수용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특히 “종소리 자체가 도시에 문화와 예술을 입혀 줬다”며 “성당이 종교시설을 넘어서 음악과 미술, 예술을 창조하는 문화적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 원도심의 지붕들 위로 떠다니던 조씨의 종소리는 끝이 났다. 본당은 프랑스에서 작은 종 8개를 추가로 제작 주문했다. 11개의 종으로 울리는, 디지털화된 새 종소리가 연말부터 조씨를 대신한다. 놀랍게도, 성당을 방문한 프랑스 종 제작자는 현재 설치된 3개의 종이 모두 자신의 조부가 만든 것임을 발견하고 “놀라운 섭리”라고 외쳤다.

서양에서는 종종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하느님의 은총은 흘러 넘친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대흥동 종소리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강요가 아니라,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문화와 예술로 영혼을 고양하는 노래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