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교황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논쟁 일지

입력일 2019-08-30 수정일 2019-08-30 발행일 1988-07-10 제 161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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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성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마찰을 일으켜온 일지를 종합해본 것이다.

▲1974년 11월 11~13일 교황 바오로 6세의 요청으로 성청 성서위원회 알베르트 데스 캠프 주교와 교회법개정위원회 귈라우메온클린 몬시뇰이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방문함.

▲1975년 6월 피에르 마미 주교가「에콘」신학교에 대해 교회법으로서의 승인을 거부함. ▲1975년 6월 10일 교회의 최고법정인 대심원은 신학교의 승인여부에 대한 판결을 해줄 것을 호소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절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은 교회 내에 커다란 상처를 가져오는 것임을 인식, 교황청에 순종할 것』을 호소.

▲1976년 6월 29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불법적으로「에콘」에서 13명의 사제와 13명의 차부제서품식을 거행.

▲1976년 7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모든 사제직으로서의 권한을 정지시킴.

▲1976년 8월 29일 교황의 명령에 도전, 르페브르 대주교는 프랑스「릴」스포츠광장에서 6천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

▲1976년 10월 11일 15페이지에 달하는 라틴어서한에서 교황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왜곡된 교회론을 채택, 교회에 반항하기 시작했다』고 비난.

▲1977년 5월 13일 르페브르 대주교 측근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2명의 바티깐신학자들과 신앙교리성 고문과 며칠간의 회담을 끝냈다고 발표.

▲1977년 7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칼라너 신부는 한 인터뷰에서『르페브르 대주교의 파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사건은 교회내의 분열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언급.

▲1979년 1월 10일 신앙교리 성장관 프란조 세퍼 추기경과의 만남 후 르페브르 대주교는 화합을 목표로 한 이번 회담의 결과는 낙관적이라고 발표했다.

▲1979년 9월 11일 바티칸대변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던 문제점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합의를 보았다는 보도를 부인.

▲1979년 1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에서 세퍼 추기경과 남몰래 만났으나 바티칸은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와 밀접한 소식통은 성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전함.

▲1982년 6월 24일 現신앙교리 성장관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직무정지를 다시 확인.

▲1983년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 사제회」총장직을 사임, 후임에 고위 장상인 프란츠 쉬미드베르거 신부를 임명.

▲1987년 1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자유선언에 관한 자신의 보수적 지침의 설명을 담은 1백 50페이지의 문서를 바티칸에 전달.

▲1987년 6월 14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라칭거 추기경은 바티칸에서 1시간 이상 회담을 갖고 개방과 상호대화의 분위기를 언급한 합동성명서를 발표.

▲1987년 10월 2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와 성찬예식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사제회를 인정하는 바티칸의 화해방안에 동의했다고 발표.

▲1987년 10월 17일 바티칸은 르페브르대주교가「사제회」를 심사하기위해 바티칸에서 임명한 방문객 명단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고 발표.

▲1988년 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몇몇 문제점에 대해 거의 합의를 봤지만 그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경우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를 임명할 것이라고 위협.

▲1988년 4월 8일 라칭거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격려.

▲1988년 5월 23일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부분적인 일치를 본 것도 없다고 발표.

▲1988년 6월 15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과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은 6월 30일 예정대로 주교 서품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발표. 바티깐대변인은 그 같은 결정은 교회법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