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곳곳에서 스러진 순교자들의 안장지 낯선 땅에 복음 전하다 순교한 선교 사제 3인 유해 모셨던 곳 박해 극심해 20여 일 지나 안장 절두산·새남터·서소문 밖 형장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노고산 여러 곳의 순교자 시신 함께 묻혀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위원회(위원장 김선태 주교)가 이번에 개정·발간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 새롭게 추가된 59곳의 성지 중에는 순교지 혹은 순교자가 묻힌 곳 중 전례가 이뤄지는 곳, 즉 ‘성지’로 분류된 곳이 4곳 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순교자들의 피가 스민 그 땅에서 순교자들을 기억해본다.
■ 신촌에 서 있는 순교자현양비 젊은이들의 거리 신촌. 이곳에는 해발고도 106m의 그리 높지 않은 산, 노고산이 있다. 바로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는 교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양성해온 터전이다. 서강대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60년. 제법 오랜 기간 교회의 정신을 퍼뜨려온 땅이다. 서강대학교 입구에서 왼쪽 길을 들어서니 등하교하는 학생들 왼편으로 서강대 가브리엘관 앞의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 서 있는 3개의 조각에는 성직자 3명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서강대가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니 예수회 출신의 성직자인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인 이 3명의 성직자들은 예수회와도, 서강대와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다. 바로 170여 년 전 우리나라 땅에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 우리나라의 신자들을 돌보고자 찾아온 선교사들이다. ■ 신자들을 사랑한 세 명의 선교사 서강대학교가 세워지기 120여 년 전, 노고산에 이 성인들이 묻혔다.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으로서 우리 땅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보다 앞서 박해 중인 조선의 신자들을 돌보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우리가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 범 라우렌시오, 나 베드로, 정 야고보라고 부르며 전구를 청하는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자들을 돌보고 조선 땅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 위해 세례를 주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런 성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박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9000명을 넘어섰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것도 이 성인들이다. 신자들을 향한 성인들의 사랑은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자 성인들은 더 열성적으로 신자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했다. 박해가 더 심해지기 전에 더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줘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해자들에게 성인들의 활동이 알려지자, 신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세 성인은 함께 관청을 찾아가 자수했다. 결국 온갖 신문과 고문 끝에 앵베르 주교는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리라 여긴 관헌들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찾으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마침내 20여 일이 흘러서야 신자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안장한 곳이 바로 이 노고산이었다. 성인들의 유해는 4년 동안 노고산에 묻혀있다 성인들의 유해를 수습한 신자 중 한 명인 박 바오로가 자기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에 이장했다. 성인들의 유해는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됐고, 현재는 절두산순교성지 지하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n사진 박원희 기자 petersc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