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권유를 뿌리치고 총 앞에서 외쳤다 “어떻게 목자로서 양을 버릴 수 있습니까” 북한군 포로가 돼 수용소로 가는 고행길 함께 묵주기도 바치며 십자가 길로 승화
참혹하다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시기가 없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건물은 무너졌으며, 산은 불탔고, 땅은 피폐해졌다. 그리고 그 안에 교회도 있었다. 당시 교회가 겪었던 수난을 잘 보여주는 것이 현재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순교자다. 근·현대 순교자들인 이 하느님의 종 중 80명이 바로 6·25 한국전쟁 으로 순교했다. 그때 교회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순교자들의 이야기에서 한국전쟁 중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 박해, 그 이상의 박해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성당 신부요.”(「모랫말 반세기:도림동성당 50년사」 중) 탕!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북한군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서울 도림동성당에서 아침미사를 드리고 나온 하느님의 종 이현종(야고보) 신부의 가슴에 총탄이 박혔다. 이 신부는 총을 맞았음에도 두려움 없이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 원이라면 마저 쏘라”며 “너희가 내 육신을 죽일 순 있어도 영혼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군은 “너는 남의 돈을 착취해 생활하는 자 중의 하나 아니냐”며 그 자리에서 권총 두 발을 더 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착취하는 자’들이었다. 전쟁으로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한반도 안에서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북한군의 총구는 교회를 겨눴다. 그저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 그것으로 죽음의 이유는 충분했다. 대부분의 납북과 처형이 전쟁이 일어난 지 2~3달 안에 일어났다. 짧은 기간에 많은 인원이 피해를 입은 것도 큰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를 잃었다.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은 전쟁 전후로 북한군에 체포되거나 처형됐는데, 그 수가 150명에 달한다. 그중에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5명의 주교와 각 교구의 지도자들이 포함됐다. ■ 양 떼를 지킨 목자 “양을 버리고 목자로서 어떻게 먼저 피난을 갈 수 있습니까. 서울에서 양들이 피난을 다 한 다음에 피난을 갈 것입니다. 먼저 피난을 가십시오.”(「감곡본당 100년사」 중) 하느님의 종 유영근(요한 세례자) 신부는 숙부모가 수차례 찾아와 피난을 권유했지만, 한결 같이 뿌리쳤다. 서울대목구 당가(현 관리국장)로서 명동성당을 지키다 결국 7월 11일 북한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유 신부는 포로로서 ‘죽음의 행진’을 하던 중 순교하게 된다. 전쟁이 터지자 사목자들은 교회를 수호하고자 결의했다. 사목자들이 수호하려 했던 교회란 다름 아닌 ‘양 떼’, 바로 신자들이었다. 서울대목구는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고 될 수 있는 대로 피난을 떠나되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할 것”을 결정했다. 이 방침으로 교회의 기능은 상당기간 지속됐고 명동의 경우 적어도 8월 6일까지도 주일미사가 거행됐다. 가정방문과 성사집전을 비롯한 본당 신부의 활동도 계속됐다. “물!, 물!, 아이고, 목말라!” “아이고, 나 좀 살려주. 아이고, 아이고.” 1950년 10월 9일 원산 와우동형무소의 방공호에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한군이 수많은 포로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학살한 것이다. 시체와 시체 사이에는 아직 숨이 붙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신음에 “응- 내가- 물 떠- 주지. 음- 내가- 가서- 구해 주지”라는 응답이 수십 차례 돌아왔다. 바로 당시 춘천지목구 양양본당 주임이었던 하느님의 종 이광재(티모테오) 신부였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가 이 신부의 목소리를 듣고 이 신부를 찾았다. 그러나 이 신부는 자신도 죽어가고 있었다. 이 신부는 운명의 그 순간까지 정신력을 모아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응답한 것이었다. 이 신부는 전쟁 이전부터 핍박을 받는 북한의 신자들을 남한으로 피신시켜 왔다. 신자들은 이 신부에게 월남을 권했지만 “북한에 있는 신자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앞장서면 나는 그를 몰고 뒤따르마. 목자는 양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전쟁이 나던 해에도 활동을 계속하다 북한군에 붙잡혔다. 서울뿐 아니라 이광재 신부를 비롯한 춘천·대전 등 여러 교구의 신부들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피난을 가지 않고 본당을, 신자들을 지켰다. 그래서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숱한 신부들이 붙잡히거나 죽음을 맞이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