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그리스도인의 이름값을 합시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9-03-19 수정일 2019-03-19 발행일 2019-03-24 제 313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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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
제1독서 (탈출 3,1-8ㄱㄷ. 12-15)  제2독서 (1코린 10,1-6.10-12)  복음 (루카 13,1-9)

오늘 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통성명을 하는 장면을 봅니다. 자신의 이름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은 관심의 표시이고 앞으로 서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일 텐데요. 그런 자리에서 모세가 계속 물러서니, 민망합니다. 마음을 탁 트고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 딱한 겁니다. 물론 모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성경은 이 현장에서 “모세는 몸이 떨려 자세히 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사도 7,32)라고 밝히는데요.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느닷없는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쩌면 모세가 알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젖을 뗄 때까지 돌봐주신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 순간, 모세의 뇌리에는 동족으로부터 배척당하여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을 것도 같은데요. 꾹꾹 눌러뒀던 쓰라린 기억에 몸서리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십여 년이나 상처를 묻어 두고 지냈던 모세였기에 매사에 자신감이 사라져 용기를 잃었던 것이라 짐작해 보는데요. 그런 형편에서 하느님을 대면하게 되었으니, 자꾸만 몸이 사려지고 뒤로 물러섰을 법합니다. 이리 생각하니 모세의 마음속에 단단히 굳어져 버린 상처를 하느님께서 덧나게 하신 것 같은데요. 그날 모세가 가졌던 두려움은 다른 무엇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대인 기피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두려움은 곧 자신의 볼품없는 처지를 강조하게 하여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라며 거절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 죄송합니다”라는 답을 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싶어 더욱 모세의 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모세의 변명은 하느님의 화를 돋울 뿐이었습니다.(탈출 4장 참조)

마음이 한가했던 어느 날, 영어성경을 뒤적이다 오늘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당신의 이름이 “I am that I am”이라고 번역된 걸 발견했는데요. 순간, 마음에 감동이 솟구쳤더랬습니다. 제 짧은 영어실력에 그 말씀은 곧 “나는 너에게 가장 필요한 그 무엇이다”라는 말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시며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존재하게 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달까요? 허약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쏟아지듯 제 영혼을 적셨달까요? 하느님이 아니면 행복할 수조차 없는 못난 존재를 위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성심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이며 전부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크 샤갈의 탈출기 이야기 중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동시에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명명된 하느님 자녀의 품위는 어떤 상황에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 갖춰집니다. 하느님 자녀의 품격을 지니고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더욱 오늘 복음 말씀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데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재난과 비극의 관점을 새롭게 조명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빌라도 총독이 군인들을 보내서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고 있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은, 솔직히 말 많고 남 탓하기 좋아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수군거리며 소문내기에 딱 좋은 사건입니다.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18명이나 사망했던 일까지 보태어 설명하십니다. 인간에게 닥치는 갖은 재난은 결코 죄와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죄가 작아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따끔히 지적하십니다. 세상은 갖은 재난이 난무하는 곳인 만큼 온갖 시련과 곤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미칠 수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이 근질근질한 우리의 심성을 다독이기 원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거듭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비유로써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십니다. 이야말로 통상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 틀렸다는 지적이라 믿습니다. 별로 미운 사람도 없고, 싫은 사람도 없으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면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 조용하고 얌전하면 착하다하고 법 없이 살아도 될 사람이라 추키며 심지어 죄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우리의 우매함을 매섭게 일깨우시니까요. 흔히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은 죄가 커서 천벌을 받았다고 여기기 일쑤인 우리의 사고방식을 고치라는 이르심이라 헤아립니다.

결국 죄란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뜻이라 살피게 됩니다. 즉 더 사랑하려 하지 않고 선을 행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잘 지낸다고 자만하는 마음이 곧 죄임을 밝혀주고 계시니까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이 곧 죄임을 명심하라는 경고이니까요.

한편 주님께서는 오늘, 모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지난날의 죄를 다시 들추어 괴로워하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런 마음은 전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일깨우십니다. 이미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를 떠올리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탄의 술수임을 명심하라는 당부입니다. 더해서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해줄 수 있는 넉넉한 은혜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이름까지 일러주시며 우리와 친해지려 하십니다. 문득 오직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이름을 “나는 곧 나다”로 작명을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요. 그만큼 못나고 덜떨어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진심으로 두텁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느님과 통성명을 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말씀에 순명하기로 약속한 나지르인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실천해줄 것을 청하십니다. 도대체 잘난 것 없는 나에게 이토록 엄청난 사명을 내리십니다. 장정의 숫자만 헤아려도 자그마치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라는 임무를 맡겨주십니다.

모자란 것 투성이인 나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모세처럼 곤란해하며 거절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한 주간, 우리에게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모세처럼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민수 12,3)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에 이런저런 꼬투리를 달며 그 자리를 모면하려 하지 않는 자세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각별한 사랑에 의탁하여 더 사랑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감사한 삶으로 도약하는 것이라 살핍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만이 우리의 승리이며 우리의 평화이며 우리의 힘이며 기쁨이심을 고백하여 그리스도인의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