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작별 / 김명규

김명규(실비아)수필가
입력일 2019-03-12 수정일 2019-03-12 발행일 2019-03-17 제 313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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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햇살이 노란 은행잎 위에서 부서지던 날, 비비안나 당신은 이민 갈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머물러 있던 아파트에 친한 교우 몇 명이 찾아갔을 때, 비비안나 당신은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복도 한쪽에 쌓아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쓸 만한 것들이어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그 알뜰함에 가슴이 뭉클했었다.

내일모레면 70을 눈앞에 둔 나이를 고려해 이민을 재고해 보라고 만류하기도 했었다. 돌이켜 보면 당신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한국으로 돌아와 외국인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들어온 당신, 친정 식구들도 모두 재미교포였던 당신 비비안나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붙잡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결혼해 사는 두 딸을 두고 한국에 남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친구지만 나는 비비안나 당신을 존경한다. 진실하고 착한 삶,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베풀고 사는 삶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겸손했다. 그런 당신이 쓰던 물건들이니 그 물건들을 물려받는 의미가 내겐 남달랐다. 부엌에서 쓰는 양념 그릇까지 새것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도착하면 쓸 수 있는 식기와 의복들만 배로 부친다고 했다. 우리는 당신이 짐을 꾸리기 훨씬 전부터 모여 앉아 가져갈 물건들을 배정했다. 침대는 ‘사라’가, 텔레비전은 ‘실비아’의 여동생이, 청소기는 내가 물려받기로 했다.

비비안나는 신구약 성경 전권을 세 번이나 필사했다. 한 번 필사하는 데 2년씩 걸렸다. 태어날 손자들을 위해, 6년 동안 영어로 한 줄, 한글로 한 줄씩 썼다. 필사본 한 권에 2000여 쪽이었다. 그걸 제본했다. 두 딸에게 필사본 한 권씩 주고, 나머지 한 권은 평생의 보물로 자신이 간직할 거라고 했다.

나는 성경 한 권을 다 제대로 읽지 못한 사람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벽 4시가 되면 일어나서 6년을 그렇게 보낸 비비안나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깊은 마음을 엿보노라면 어쩌면 깊은 시련의 골짜기를 빠져나온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당신은 서울 한강본당으로 전입해 2년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시간을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혼배미사와 장례미사를 전담했던 체칠리아 성가대에서 만난 친구, 65세 이상 노인들로 이뤄진 합창대이고 보니 처음엔 말들이 많았다. 혼배미사가 끝나고 피로연 뷔페를 먹을 때면 노래도 못하는 늙은 성가대원들이 음식만 축낸다는 소릴 듣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하게 있는 힘을 다해 발성 연습을 거듭했다.

비단을 펼쳐놓은 듯 빛나던 남색 하늘이, 프리즘처럼 번지면서 아롱거릴 때 우린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헤어졌다. 비행기에 실어 가는 한국 식품들이 다 떨어지거든 장 보러 한국에 오라는 내 말에, 당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

어느 곳에 있어도 기도와 봉사를 놓지 않을 보고 싶은 비비안나. 미국과 한국 사이 우리 지하철을 타고 놀러 다니듯 오갈 수 있는 거리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큰 목적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했다. 작은 사도로서 사랑의 사명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비비안나, 당신이 보고 싶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명규(실비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