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주님의 정원에 자라는 좋은 과일나무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입력일 2019-02-25 수정일 2019-02-26 발행일 2019-03-03 제 313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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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8주일
제1독서 (집회 27,4-7)  제2독서 (1코린 15,54-58)  복음 (루카 6,39-45)

연중 제8주일인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삶의 여정에 간직해야 할 지혜이며 규범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나무의 재배과정과 품격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사는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어놓는 좋은 과일나무가 되게 해주시기를 삼가 청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유다 지혜문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에 규범이 될 하느님의 다양한 지혜 말씀 가운데 값진 말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십니다.(집회 20, 23, 27장) 수다스런 말은 남의 미움을 사고, 거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쓸모없는 말이 실수를 장만하고 거짓말은 불명예를 낳습니다. 그러기에 혀끝은 화살촉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급한 말 한마디가 공동체에 불길을 일으킬 수 있기에 때를 기다리며 침묵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방앗간에 가면 액체를 거르거나 고운 가루를 받을 때 ‘체’를 사용해 찌꺼기를 걸러냅니다. 이처럼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사람의 허물은 말에서 드러납니다. 도자기가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됩니다. 말로 실수를 자주 한다면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거짓말로 외면을 당하기보다 입술에 봉인을 하거나 마스크를 쓰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의 칭찬을 삼가 해야겠지요.

안식일에 부르는 찬미가(화답송, 시편92)는 주님의 자애와 업적의 위대함을 노래합니다. 의인은 주님의 앞뜰에 심겨진 좋은 나무와 같습니다. 수액이 많아 싱싱하게 자라나 늙어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고 올곧으시며 불의가 없으시기에 사랑과 정의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가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씀(호세 13,14)을 빌어 예언적인 비전을 제시합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4-55) 전갈이 독침을 갖고 있듯이 죽음의 독침은 죄입니다. 죄는 율법에서 그 힘을 얻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생기기 전에 아담의 죄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와 흙에서 온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창세 3,19)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원인인 죄를 없애시고 사랑의 새 계명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고 흔들림 없이 주님의 뜻에 따라 각자의 사명을 다할 때 그 노고는 헛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압니다.

피테르 브뢰헬의 ‘장님의 비유’.

오늘 복음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입니다. 그 의도는 주님의 뜻과 행동방식을 제자들도 따르게 하여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과 연관된 인체의 신비를 간단히 살펴봅니다. 눈은 마음의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래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귀와 입은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입니다. 손과 발은 행동으로 옮기는 신체의 주요 부위입니다. 인간은 신체의 외부와 내면이 하나로 결합된 인격체이기에 마음이 늘 함께 합니다. 각자 마음은 그 쓰임새에 따라 품위를 드러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가 스승보다 높다고 하면 더 배울 것이 없기에 좋은 스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가진 자가 남의 눈에 티를 어찌 빼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남을 가르치거나 남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보고 자기반성을 하도록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그러한 노력이 부족한 ‘위선자’는 눈먼 자이기에 누가 따르며 신뢰하겠습니까?

‘위선자’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에게 준 호칭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만이 ‘위선자’란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티끌만한 잘못은 지적하면서도 정녕 자신의 들보 같은 죄나 실수는 무시한 채 가면을 쓰고 율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자(hypocrite, hypokrites)란 말은 고대 그리스 문명 때는 해설자, 웅변가, 기만이나 사칭(…인체)하는 자는 물론 무대 배우까지 포함한 의미였다고 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압니다.”(루카 6,43; 마태 7,17)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는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도 예언자입니다. 구약시대에 거짓 예언자가 많았습니다. 그 차이는 행동의 질, 곧 열매에 달려있습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쁩니다. 위선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압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거룩한 신앙선조들은 언행의 일치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오는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참회의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과 금육을 지키는 이날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에 단식과 기도와 회개로 단순한 삶을 살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면을 정화하여 거룩한 부활축일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