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은 둘이 아니니 / 김형태

김형태 (요한) 변호사
입력일 2019-02-25 수정일 2019-02-26 발행일 2019-03-03 제 313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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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이었던 것도 같고, 운동장가 포플라 이파리들이 다 피어난 초여름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 신나게 신발주머니 휘두르며 교문을 나서던 어느 토요일 오후가 생각납니다.

저 뒤편 강당에선 큰 북, 작은 북 쿵쿵거리고, 심벌즈 챙챙거리고, 캐스터네츠 딱딱거리고, 학교 앞 ‘기쁜 소리사’ 고교야구 중계방송 소리가 거리를 넘실댔습니다. “와와” 함성소리, 밴드부 트럼펫 소리. 그리고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 놀라 빵빵대는 삼륜차 경적 소리.

어느 한순간 온 천지에 ‘삶의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 꼬맹이 시절에서 반백 년이 흘러 이제는 삶의 슬픔, 존재의 덧없음도 알게 됐습니다.

지난겨울 친구 둘을 보냈습니다. 한 친구는 시집도 안 가고 조그만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부처님 책들을 열심히 보시하다가 갑자기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저렇게 예쁜 사람에게 어찌 ‘이것도 다 인연이니라.’ 말씀하실 수 있나요. 혼자 살던 또 다른 친구는 주방 냉장고 앞에 엎어져 삶을 마쳤습니다. 그는 매일 소주 두세 병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십여 년 전 돌아간 어머니 영정 사진을 향해 오늘은 어떤 주식을 살까요 묻고 어머니 시키는 대로 주식을 사고팔았습니다. 아버지 다른 형이며 여동생과는 소송을 벌이고 연락을 끊고 지내왔기에 자기가 죽으면 전 재산을 좋은 데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유언공증을 하겠다 해서 대낮부터 만나 같이 술 한잔을 걸쳤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증사무실 가는 길에 나를 보고 욕을 해대는 거였습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너 나 빨리 죽으라고 이따위 유언공증 하라 꼬드기는 거냐?”

내 꼬맹이 시절 어느 순간 문득 천지에 가득한 ‘삶의 기쁨’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처럼, 친구는 차들과 사람들로 가득 찬 강남 거리 한복판에서 갑자기 죽음의 슬픔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공증은 뒤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화장해서 산으로 데려간 겨울 아침 그의 전 재산은 가장 미워했던 형제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습니다. 아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저 수십억 재산을 녀석이 공증하도록 하셨다면 얼마나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탬이 됐을꼬.

그렇습니다. 삶이 우리에게, 그리고 이 추운 겨울 흰 눈 덮인 산속에서 먹을 것 찾아 헤매는 길고양이에게 주는 이런저런 모양의 괴로움, 슬픔들. 어린 시절 영원히 계속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삶의 기쁨은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존재의 슬픔으로 바뀌어 갑니다. ‘세상은 덧없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엄청난 벽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기댈 커다란 위안이 있습니다. 서로 죽이고 죽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공자님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가르치려 평생 수레를 타고 힘들게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셨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석가세존도 깨치고 나서 이레를 번민하셨다는 거지요. 홀로 독립해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고 모두가 서로 기대어 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줘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할 텐데 이걸 가르쳐야 하나. ‘왜 내가 없어?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렇게 나올 텐데. 그럼에도 당신은 제자들의 비난과 배반, 후원하던 왕들의 몰락 등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쉼 없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본을 보이셨지요.

예수님도 당신 가르침을 사람들이 제 잇속대로 받아들이는 걸 보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셨지요. 그래도 당신은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할 걸 알면서도 율법과 기득권을 향해 단호히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가 복이 있다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거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고, 누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느냐고.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셨지요.

그리하심으로 그분들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둘이 아니라 도(道)요, 전체이신 당신 안에서 하나임을 몸소 보여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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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