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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새봄의 꽃말은 ‘로사리오’ / 한분순

한분순 (클라라) 시인
입력일 2019-02-19 수정일 2019-02-19 발행일 2019-02-24 제 313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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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매일이 축일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은 달콤한 밸런타인데이를 지나며 안식일에 들어간다. 다감한 볕에 초콜릿이 녹듯 서늘한 마음이 말랑해지는 봄은 부활의 계절이다. 꽃들은 그늘마저 반짝이며 모두가 고와진다.

엄격해 보이는 블랙커피에 사교적인 하얀 크림이 쾌활히 스며들어 풍미가 온화해지는 것처럼, 어디에서든 낯선 객체들이 나란히 함께하는 모습은 포근하다.

갸륵한 신앙은 의도하지 않는 충실함이다. 지구에서 이념이 사라지고 있는 까닭은 인위적 믿음의 가벼움일 것이다. 언어는 아름다워야 하며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평화가 깃드는 봄이다. ‘채소의 기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고, 약육강식이라는 명제가 녹아 없어지는 계절이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처음이기에 조금은 서투르니, 봄이 돼 젊음이 재생된다면, 다들 훨씬 신나는 생이 될 텐데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시인은 나이가 들지 않는 듯하다. 어른이 돼서도 문학 소녀의 두근거림을 품으며 싱그러움은 이어진다. 작가라는 존재들은 내내 잘 익은 청춘 같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 봄의 자연은 그 자체로 훌륭한 서재다. 따뜻하게 귀여움을 받아서 스스로를 단련하며 푸르게 돋는 새싹의 정중동이 기특하다. 살갑게 반가운 볕을 쬐고 있으면 생명이 여물듯 슬기의 정혜(定慧)가 저절로 익었으면 좋겠다.

밝음의 은총을 받으며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이 되는 봄이다. 통속의 무게가 곱게 데워진 기운에 휘발돼 감각이 흐드러진다. 새삼 복된 심정이다.

이제는 모두 인터넷에 글을 올리며, 그렇듯 독자와 작가의 경계가 없다. 온라인은 나만의 등단 공간이며 저마다 갖춘 창작의 영토에서 눈부시게 머무르는 것이다. 솜씨가 낡지 않게 꾸준히 생각을 쌓아 올리는 탁마의 태도를 지니려 한다. 곁을 스치는 작은 움직임에도 시심을 닮은 설렘이 일어난다. 가는 곳마다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달이 고요의 바다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마르지 않는 배려가 어둠조차도 조용히 환하게 감싼다. 별들이 형언하고 있는 반짝임은 은하계가 창작해 내는 압운법이다. 대륙은 정교하며, 만물은 본연 그대로 아름다운 생명들이다.

비단처럼 감기는 봄은 섬세한 우울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 무렵엔 나를 지켜주시는 힘이 있음을 새기며, 웃음을 시침질하는 꽃 바늘로 슬픔을 누벼 마음 다잡으면 된다. 서정적 산책이나 단정한 식사의 고마움은 이어질 것이다.

저마다 손에는 봄볕 받을 겨를도 없이 휴대폰을 들고 다닌다. 그 디지털이 주는 온기도 세련된 즐거움이다. 정성스러운 메시지는 누군가에겐 또 다른 메시아다. 하늘의 말씀처럼 다정한 격려가 된다. 그래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닉에 갇혀 은혜로운 창조물이 만들어 내는 자태들을 바라볼 찰나를 잊는 것은 아쉽다. 휴대폰에 몰입된 눈길을 틈틈이 거두어, 사람과 사물에 가만히 감탄했으면 좋겠다.

봄은 결결마다 보드라워 거듭 살아 내는 단단함을 지닌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힘 있는 것이다. 삶을 쓰다듬어 주는 날씨 속에서 새봄의 꽃말에 어울리는 것은 ‘로사리오’(rosario)라고 생각한다. 로사리오의 뜻인 ‘장미의 화원’보다 아름다운 기도가 늘 깃들 우리의 기쁜 삶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분순 (클라라) 시인